상처의 맨얼굴과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내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말이다. 외로움과 절박함의 끝에 섰을 때, 자기 믿음이 채워지지 않고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코치는 이미 당신에게 그럴 만한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결국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임을 스스로 믿도록 돕는다. 자꾸 상처만 노려보다 걸려 넘어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을 믿어요. 저의 목표는 내가 당신을 믿는 것보다 당신이 스스로를 더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p.18
나는 이해한다고 말하면서 도망치는 사람들을 자주 보았다. 지난날을 들추어봤자 골치만 아프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걸 알기에 이해한다고 한다. ‘아프다’고 하지 않고 ‘이해한다’고 말하고, ‘슬프다’고 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고 답한다. 나도 이전에는 사람들이 엄마와 떨어져 사는 가여운 아이의 심정을 위로해주려고 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엄마를 이해해요. 나 같아도 우리 아빠랑 살지 못했을 것 같거든요. 엄마도 어렸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지요.” 이렇게 말하고 나면 사람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서야 안 일이지만 그 이해는 진짜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도 자식을 버리지는 말았어야 했다. 나는 엄마가 너무나 필요한 나이 7살이었다. 그러나 그저 이해한다고 덮고 지나가야 덜 상처받는다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덜 불쌍하게 보인다고 생각했다. --- p.64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마음의 건강상태를 짐작하는 몇 가지 기준이 있는데, 그중에 ‘time zone’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는 과거를 살아왔고 현재를 살고 있으며 미래를 살아갈 것이다. 저마다 이 세 개의 시간 차원에 얽혀 있다. 그러나 시간을 운영하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식으로든 삶의 균열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은 시간의 차원들이 불균형 상태에 있다. 한쪽에 지나치게 힘이 실린다. 이를테면 과거의 한 시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거나, 무기력하게 현재에 매몰되어 있거나, 앞뒤 돌아볼 여력 없이 미래를 쫓아 내달린다. 물리적인 시간과는 별개로 심리적 고착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 p.72
나는 당신이 얼마나 참다가 그랬는지, 오죽했으면 그랬는지 안다. 당신은 보살핌이 필요했고, 위로를 갈구했으며, 사과를 기다렸다. 오랜 시간 동안 욕구의 결핍에 노출된 사람은 그런 심정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 지옥 같은 마음을 헤아리고 싶다. 죄책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환상적 신념, 자식에게 적합한 감정이 따로 있다는 잘못된 생각에서 출발한다. 그런 것은 없다. 모든 감정은 타당하고 정당하다. 우리에게는 질투하고 미워하고 분노할 정당할 권리가 있다. 그것이 부모, 가족일지라도 말이다. --- p.95
이십대 후반쯤 되었을 때, 원하는 삶을 만들어가려면 ‘기특한 딸’의 역할부터 그만두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사이 부모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어른들을 만나고, 다양한 책을 읽고, 타인의 인생을 함께 걸으면서 내가 인생의 감독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쩌다 맡게 된 배역을 그만두어도 된다는 용기도 배우게 되었다. --- p.214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싶을 때는, 이렇게 사소해도 되나 싶은 일들을 찾아서 하루를 살자. 누군가는 보고서를 완성할 테고, 아이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거나 틈내서 책을 읽을 것이다. 동네 한 바퀴를 돌거나 친구를 위해 선물을 준비하고,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과거를 보상하기 위해 시간을 채우지 말고, 당신의 평범한 목표를 위해 시간을 늘리자. 지독하게 외롭고 적막한 밤이 오면, 나약하고 무기력했던 예전의 나를 불러내지 말고 오늘 흘렸던 작은 땀과 그 확실한 노력을 보면서 잠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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