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우주적 질서 속에서 사주라는 특정한 기호를 부여받는다. 명리학은 단순히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사주의 한계를 규정 짓고, 미래의 가능성을 제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명리학은 한 개인을 둘러싼 자연의 질서와 잠재력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다가올 미래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알려주는 삶의 유용한 도구이자 무기다.
--- p.10, 「프롤로그」 중에서
하지만, 시대가 달라진 만큼 고전에서부터 내려온 갑갑병존과 을을병존의 부정적인 뜻을 곧이곧대로 해석하는 건 무척이나 곤란하다. 과거 신분제 사회에서는 갑목의 주체성이 너무 강한 사주는 부정적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기 주체성이 강조되는 현대사회에서는 갑목의 강한 주체성이 오히려 긍정적으로 발현될 소지가 크다. 만약 갑갑병존인 사람이 신강할 경우, 사회생활을 통해 스스로를 낮추고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조언해주어야 한다. 강한 기운은 자연스럽게 설기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고전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시대에 맞게 해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상담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고전을 통해 얻은 얄팍한 지식이나 기술로 상처를 줄 게 아니라, 내담자와 눈높이를 맞추고 공감하기 위한 자세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 p.31, 「갑목과 을목: 성장과 생존, 에너지의 양상」 중에서
명리학계에는 ‘형’이나 ‘살’이라고 하여 꺼리는 기운이 있다. 특히 원진살, 상형 같은 불리한 기운의 원리를 살피기보다, 이를 절대화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공포를 조장하고 그들을 겁박하는 악습이 있다. 예를 들면 진해 원진은 용이 자신의 못생긴 돼지코를 싫어한다거나, 돼지의 지저분한 코를 싫어하니 용띠와 돼지띠의 궁합은 볼 필요도 없이 안 좋다고 말하는 식이다. 나아가 묘신 원진을 두고 원숭이가 토끼의 빨간 눈을 보면 기분이 나빠지니 서로 원수가 된다고 말하는데, 이런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 못할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식의 설명은 명리학을 빈곤하고 황폐한 술수로 만들 뿐이다.
--- p.102, 「지지의 속성 확장하기」 중에서
명리를 해석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시대에 따라 사회질서는 물론, 인간 삶의 양상 또한 달라지기 때문에 고전의 틀에 사로잡혀 이들을 길신이나 흉신으로만 해석해선 결코 안 된다는 점이다. 음양오행에 우열이 없듯, 음양오행에 기반하여 만들어진 십성에도 가치나 서열이 매겨질 수는 없는 일이다. 후술하겠지만, 개인의 개성을 마음껏 드러내면서 살아갈 수 있는 요즘에는 과거에 흉신으로 바라봤던 겁재나 상관 같은 십성들이 쓰기에 따라 오히려 큰 장점을 가질 수 있다.
--- p.124, 「십성의 가치와 서열」 중에서
예를 들어 십성을 자동차에 비유해보자. 비겁을 차체의 크기라 한다면, 식상은 자동차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 된다. 재성은 차가 향해가는 목표 지점, 관성은 자동차의 무게나 트렁크에 실은 짐이 되며, 인성은 차체의 무게를 지탱하면서 차가 굴러갈 수 있게 흔들림을 방지해주는 충격 흡수장치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어보자. 비겁은 자동차의 배기량이다. 비겁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동차의 배기량이 높아지는 것과 같다. 식상을 자동차가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페달로 볼 때 식신은 일반 엑셀, 상관은 터보 엑셀이 된다. 재성은 자동차가 현실적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동력인 기름이다. 관성 중 편관은 도로에서 불시에 튀어나오는 단속 경찰, 정관은 신호등으로 볼 수 있다. 인성은 자동차가 멈출 수 있게 해주는 제동장치, 즉 브레이크에 해당한다.
--- p.192-193, 「십성 제대로 활용하기」 중에서
유튜브를 조금만 뒤져보면 연주가 겁재일 경우 할아버지나 조상이 도둑놈이라거나, 편재일 경우 좀 놀 줄 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영상이 높은 조회수에 힘입어 버젓이 돌아다닌다. 연주가 정인인 것을 두고 학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난 근거로 삼는 해석도 있었는데, SF소설에 버금가는 무한한 상상력과 박력 있는 해석에 무척이나 놀랐던 기억이 있다.
친형제나 친자매, 친부모와 친자식의 사주를 나란히 놓고 보면, 당연히 연주가 같을 확률보다 다를 확률이 훨씬 더 높다. 형의 연주에는 식신만 있고, 동생에게는 편인만 있다고 가정해보자. 형의 사주를 보고는 “편인이 필시 식신이라는 밥그릇을 엎어트렸을 것이니 조상님이 가난했을 것”이라 말하고, 동생의 사주를 보고는 “식신이 살아 있으니 조상님이 유복했겠네.”라고 말할 것인가?
연주가 모두 정관이거나 정인이면, 대략 초년에 공부 또는 시험운이 좋다고 여기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다. 사회궁을 의미하는 연간이나 월간에 정관이 떠 있다 하여 “자넨 필시 국가 공무원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도, 일부의 십성이나 신살로 사주 전체를 규정하는 것만큼이나 곤란한 해석에 불과할 뿐이다.
상담을 할 때 시주에 겁재가 있으니, 나중에 자식에게 내 재물을 뺏기게 되는 거냐고 질문한 내담자가 있었다. 심지어 그분은 자식도 없었다. 시주에 식신이 있으면 자식복이 있고, 시주에 편관이나 상관 같은 (고전적 관점에서의) 흉신이 있으면 내 말년은 물론 내 자식도 불운하다는 이야기가 되는 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퍼지다 보니, 이런 단적인 해석이 명리학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 p.288-289, 「근묘화실론을 차용한 단식 해석 비판」 중에서
명에 순응한다는 말은, 내게 주어진 도구를 쓰며 내 삶을 좀 더 행복하고 의미 있게 이끌어간다는 뜻이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할 뿐,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는다. 남들이 볼 때는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내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큰 일에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자기에게 주어진 명을 온전히 이해한 자는, 어떤 삶을 살든 본인이 이 넓은 우주 속에서 홀로 빛나는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세상에는 절대 완벽한 사주란 있을 수 없다. 주어진 명은 고정되어 있더라도, 다가오는 운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삶의 양상이 펼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명과 운을 함께 일컬어 운명이라 말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이 시시각각 변하는데, 어떻게 개인의 운명 따위가 고정 불변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명리학은 음과 양의 변화에 바탕을 둔 학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히 명리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사기이자 정말 무식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 p.336,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