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였다. 갑자기 운전석의 남자가 비명을 질러댔다. 마치 눈앞에 벌어진 일들을 그제야 본 것처럼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연우는 황급히 운전석의 문을 열었다. 그런데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눈앞에 드러났다. 남자가 계속해서 밟고 있었던 것은 브레이크가 아니라 액셀이었다. 오작동으로 인한 급발진은 아니었다. 연우가 손을 뻗어 남자의 발목을 들어 올리자 SUV는 곧바로 멈춰 섰다. 순식간에 소음이 사라지고 카페 안에는 적막이 흘렀다.
“무……슨 일입니까?”
남자는 어리둥절해하며 연우를 쳐다봤다. 조금 전까지 자신이 한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pp. 10~11
“아주 살벌한가 봐? 죽어나네?”
아직까지도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정범을 보며 태훈이 물었다.
“똑같지, 뭐. 두 동강 난…… 우욱.”
“이번에도 혈흔은 없고?”
“전혀.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피를 빼낸 뒤, 여기다 갖다 버렸나 봐…….”
“말이 돼? 산이나 바다에 버렸으면 버렸지, 어느 미친놈이 멀쩡히 잘 다니는 버스 안에다가 보란 듯이 사체를 갖다 버려?”
“그렇지? 말이 안 되지? 그러니까 사람 미쳐 죽겠다는 거야. 뭐 이런 엿 같은 사건이 다 있어?”
pp. 16~17
쓰러져 있던 연우가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반면, 마석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분주히 움직이는 119대원들이 보이고, 그 너머로 불타고 있는 건물의 외관도 보였다. 눈앞에 모습들이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물 밖으로 탈출해 있었다.
‘뭐야? 어떻게 나온 거지?’
기억해낼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무언가 머릿속에서 자꾸만 떠오르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날카로운 면도칼로 도려낸 것처럼 기억의 편린이 잘려져 있었다. 하지만 의식을 잃고 기절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 하나만은 확신했다.
p. 39
무레르는 오셀로 게임을 보면서 그것이 수혼인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인간의 모습으로 있다가도 우연치 않게 수혼을 경험하게 되면 잠들어 있던 수혼의 정체성이 깨어난다. 계속되는 살해에도 수혼인의 수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한 명이 두 명이 되고, 두 명은 네 명, 네 명은 곧 여덟 명이 된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늘어간다. 무레르는 끝없이 등장하는 수혼인 때문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신이 내린 숙명일지라도 거역하고 싶었다.
pp. 83~84
태훈은 믿을 수 없었다. 석환이 몰던 경찰차가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달리는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나뒹구는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4차선 도로 한복판에 쓰러져 있는 119대원의 모습이 잠깐 보이는 듯했지만, 전복되는 경찰차와 뒤엉키며 곧 사라졌다.
간신히 멈춰 선 태훈은 눈앞에 펼쳐진 참혹한 모습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앞 유리를 깨고 밖으로 튀어나와 있는 석환의 모습이 보였다. 허리가 반쯤 걸려 있었고, 반대로 돌아간 머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원망하듯 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심장도, 호흡도 멈춰 있었다.
pp. 140~141
한껏 달아오른 호흡을 거칠게 몰아쉬며 후배의 겉옷을 벗겼다. 후배도 거칠게 응하며 보영을 침실로 밀어붙였다. 천천히 하라고 말하려 했는데, 어느새 달려든 후배가 젖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흔들어댔다. 아팠다.
“아파, 좀 천천히 해.”
“조용히 해!”
순간이었지만 보영은 후배의 그 낮은 목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낯설었다. 평소와 다른 모습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마치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강간이라도 당하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pp. 200~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