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표지판’을 뜻하는 우리의 고유한 말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책 표지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말 가운데 책의冊衣 란 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립국어원에서 발행한 『표준국어대사전』에 ‘책의’는 “책의 맨 앞과 뒤의 겉장. 책가위”라고 설명되어 있다. 다시 ‘책가 위’는 “책의 겉장이 상하지 않게 종이, 비닐, 헝겊 따위로 덧씌우는 일. 또는 그런 물건. 가의加衣·책가의·책갑冊甲·책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책의’는 책 표지를 뜻하는 ‘책가위冊加衣’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를 다시 옛 문헌에서 확인해보면 『조선왕조실록』 세종 7년 을사 (1425) 윤7월 17일 조條 등에 ‘책의’가, 『조선왕조실록』영조 원년 갑진(1724) 10월 20일 조 등에 ‘가의’가, 『일기청등록日記廳謄錄』 개수일기등록改修日記謄錄 감결질甘結秩 영조 13년 무진(1748) 8월 11일 조 등에 ‘가의假衣’란 용어가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한편 『율곡서栗谷書』의 표지에서는 ‘책가위’란 말의 용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율곡 이이李珥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1859년에 필사한 책으로, 표지에는 ‘도유협흡모춘상완가의屠維協洽暮春上浣加衣’라 쓴 글씨가 있다. ‘도유협흡’은 기미년을 이르는 고갑자古甲子이고, ‘모춘상완’은 음력 3월 초순을 가리킨다. 맨 끝의 ‘가의’는 곧 ‘책가위’를 뜻하는 말이다. 이를 다시 풀이하면 “기미년(1859) 음3월 초순에 책가위를 만들다”라는 뜻이 된다. 또 『백졸암선생문집百拙菴先生文集』의 표지에는 ‘책가위판’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숨겨져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 중기의 학자 유직柳稷의 문집으로 1789년에 목판본 2책으로 간행되었다. 이 책의 표지는 불규칙적인 뇌문雷文 바탕에 연화를 중심으로 능화 등의 꽃문양을 장식했는데, 이곳에 ‘책가의판冊假衣板’이란 명문銘文이 박혀 있다. ‘책가의판’은 ‘책가위판’의 또다른 별칭으로 “아름다운 책 표지판”을 뜻한다. 위의 사례로 미루어볼 때 조선시대에는 ‘책의冊衣’ ‘가의加衣’ ‘가의假衣’란 말과 함께 ‘책가위판冊加衣板’ ‘책가위판冊假衣板’이란 말이 ‘책 표지’와 ‘책 표지판’을 지칭하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책가위판’을 지칭하는 말로 잘못 알려진 ‘능화판’이나 ‘책판’ ‘책판 문양’이란 명칭은 ‘책가위판’ 또는 ‘책가의판’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pp.23-25
『무정』은 1918년 7월 신문관과 동양서원에서 초판 발행 이후 일제 강점기에 모두 8판이 발행되었다. 1920년 1월에 회동서관에서 재판이, 1922년 2월에 3판, 5월에 4판, 1924년 1월에 5판, 그해 12월에 6판이 발행 되었다. 그후 박문서관에서 1934년 8월에 7판이, 1938년 11월에 8판이 각각 발행되었다.
『무정』 발간 직전인 1918년 6월 『청춘』 14호에 실린 광고에는 “630엽頁에 정가 1원 30전으로 1,000부를 찍었다”고 되어 있다. 실제로 이 책의 면수는 판권면版權面까지 624면이다. 여기에 별도의 면수로 표시된 서문 4면과 속표지 앞뒤 2면을 합하면 630면이 된다. 판권版權에는 ‘발행 신문관과 동양서원, 저작겸 발행자 최창선崔昌善, 정가 1원 20전’으로 되어 있다.
어찌된 까닭인지 광고에 표시된 광고의 가격과 실제 책의 가격이 다르다. 한편 초판의 판권에 책의 제목과 저자 이름이 빠져 있다. 저작겸 발행자 최창선은 최남선의 형으로 신문관의 사주였다. 물론 저작겸 발행자란 실제 저자와 출판사의 대표자가 동일인임을 뜻하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단지 판권의 실질적인 소유자가 누구인가를 명시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정』의 판권을 소유한 것은 저자가 아닌 신문관이요 이광수가 아닌 최창선이라는 의미다.
4판은 초판에서처럼 최남선이 ‘한샘’이란 필명으로 쓴 서문 4면이 있다. 본문은 다시 1면부터 시작해 559면에서 끝난다. 따라서 이 책은 모두 563면이 된다. 6판 역시 본문이 559면으로, 4판과 동일한 조판으로 인쇄하였다. 4판과 6판의 정가는 1원 80전이다. 4판의 판권에는 발행소가 광익서관廣益書?과 회동서관으로 되어 있고, 6판의 판권에는 발행소가 흥문당서점興文堂書店과 회동서관으로 되어 있다. 또 4판과 6판의 판권에는 저작권 소유자 겸 발행인이 모두 고경상高敬相으로, 인쇄소는 계문사인쇄소啓文社印刷所와 흥문당인쇄소로 각각 기록되어 있다. 광익서관과 흥문당서점은 회동서관 설립자인 고유상의 둘째 동생 고경상이 운영하고 계문사인쇄소는 첫째 동생 고언상高彦相이 운영하던 회동서관의 자매회사다.--- pp.46-47
산업기에 해당하는 1977년부터 1983년까지의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1977년 『부초』(한수산, 민음사), 1978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문학과지성사), 1979년 『바구니에 가득찬 행복』(임국희·최양묵, 전예원), 1980년 『만다라』(김성동, 한국문학사), 1981년 『어둠의 자식들』(황석영, 현암사), 1982년 『인간시장』(김홍신, 행림출판), 1983년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버스카글리아, 김영사)이다. 이 중에 북디자이너가 알려진 책은 정병규의 『부초』와 백영수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백인수白寅洙의 『만다라』, 양문길의 『어둠의 자식들』이다.
이처럼 베스트셀러 중에 북디자인이 우수한 책들이 포함되니 이에 대한 인식이 한층 새로워졌다. 그 결과 출판사들은 북디자인을 담당하는 전문 디자이너를 고용하거나 외부의 북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양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북디자이너 이름을 밝히지 않은 예가 더러 보이는데 정병규를 비롯하여 안상수·서기흔·조의환·최만수의 작업에서도 처음에는 북디자이너의 이름이 대부분 빠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아직 북디자이너의 자리매김이 유동적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70~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출판계는 그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양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여기에 북디자인도 유행의 한 패턴이 되어 화려하고 자극적인 디자인으로 흐르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정병규의 『부초』 이후에 나타난 현상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정병규가 지적했듯이 어느 시대나 디자인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경우를 겪는 것 같다. 누군가의 스타일을 따라 하거나 나중에는 거기서 벗어나는 경우가 그것일 것이다.--- pp.82-83
북디자이너는 멋진 책을 만드는 사람이다.
지금부터 40~50년 또는 100년 전쯤의 한국 근대 도서들은 어쩌면 우리 출판계가 만들어낸 어중간한 서구화의 산물로 치부되어왔는지 모른다. 누렇게 바래고 만지면 부스러지기 십상인 이 책들은 비록 궁핍한 시대의 산물이지만 차가운 컴퓨터 화면 속에서 만들어져 매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지금의 책들과 비교하면 하나하나 정성 들인 손길이 그대로 배어 있어 더 따뜻하다. 상업적인 목적보다는 친구나 선후배의 부탁으로 이루어졌던 표지디자인은 그들 사이의 애정이 느껴져 인간적이다.
또 서로 눈에 띄고자 과장된 포장과 디자인으로 치장된 지금의 책들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었던 상황 속에서 오히려 정직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져 서로 조화롭기까지 하다. 물론 섣불리 이 책들이 우리 미술계나 북디자인계에서 어떤 큰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혼란스럽던 과도기의 시대적 산물로서의 이것들은 현재의 한국 출판을 다시 바라보고 미래를 내다보기 위한 작은 지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용준이 두 달에 한 번씩 『문장』의 표지를 맡아 그릴 때의 일이다. 그는 그 두 달 동안 길을 걸을 때나 밥을 먹을 때나 한시도 고안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어떤 때는 꿈속에서 기이한 영감을 얻기도 했고 어떤 때는 친구들과 이야기하다가도 구상을 하기도 했다. 김용준의 경우 처음에는 북디자인이 무엇인지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북디자인에 대단한 취미가 있었다거나 소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해본 도둑질이 버릇이 되었고 그다음에는 정 궁할 때 돈푼이나 생긴다니까 염치불구하고 해주었다. 대개는 아는 친구를 통해서 시집과 소설집의 표지디자인 부탁을 받았는데, 그러다 전연 알지 못하는 출판사나 작가들까지도 찾아오게 되었다.
--- pp.93-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