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다윗의 초장을 걸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건 바로 ‘소외’라는 이름의 풀밭이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피부가 무슨 색인지, 어떤 차를 타는지, 어느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얼마나 넓고 좋은 사무실에서 일하는지, 무슨 학위를 가지고 있는지, 따위를 가지고 등급을 나누려 드는 사회통념 때문에 모두들 지쳐 있다. _(중략)_
당신 역시 소외의 골리앗이라면 진저리가 나는가? 그렇다면 이제 놈에게서 눈을 뗄 때가 되었다. 그런 평가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 정작 중요한 건 한 사람 한 사람을 지으신 분의 생각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삼상 16:7).
사무엘상 16장 7절은 사회의 학카톤(말째)에게 주신 말씀이다.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소외된 이들을 향한 약속이다. 하나님은 아무도 버리지 않고 온전히 들어 쓰신다.
주님은 심판을 피해 달아났던 모세를 사용하셨다. 요나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지만, 결국 쓰임을 받았다. 라합은 매음굴로, 삼손은 못된 여인의 품으로 피했다. 야곱은 제자리를 맴돌았고, 엘리야는 산속으로 몸을 숨겼다. 사라는 자포자기에 빠졌고, 롯은 악한 무리들과 어울렸다. 하지만 주님은 이들을 모두 불러다 일꾼으로 삼으셨다.
다윗은 어땠는가? 하나님은 베들레헴 주위의 산간을 누비는 소년을 보셨다. 소년은 빛나기는커녕 지루하기 짝이 없는 양치는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하나님은 형의 목소리를 빌어 다윗을 부르셨다. “다윗아, 잠깐 집에 들어왔다 가야겠다. 어떤 어른이 널 좀 보자고 하신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저 호리호리한 십대 아이에 지나지 않는다. 소년의 몸에 묻어 온 양 노린내 때문에 다들 코를 잡으며 눈쌀을 찌푸린다.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신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삼상 16:12).
주님은 아무도 못 보는 걸 보셨다. 바로 마음이다. 다윗은 결점이 많은 인물이지만 종달새가 동트길 갈구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찾았다. 주님 마음을 좇아 살았으므로 그분의 성품을 닮아 갈 수 있었다. 하나님이 구하는 인재의 요건은 그것 하나뿐이다. 세상은 가슴둘레나 지갑 두께로 인간을 평가한다. 하지만 창조주는 다르시다. 그분은 마음을 보신다.
--- p. 29-30
빵과 검, 음식과 무기. 교회는 양쪽 모두를 공급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럼 교회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가?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니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은 복잡한 삶을 살고 있게 마련이다. 십중팔구는 도망자 신분으로 교회에 들어선다. 사울의 분노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누군가의 잘못된 결정을 피해 은신처를 찾는다. 지도자, 교사, 목회자 등 아히멜렉처럼 교회를 이끄는 이들은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회색지대를 마련해 두고 있어야 한다. 옳고 그름을 가리기에 앞서 양쪽 모두를 포용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교회를 향하여 줄곧 온 세상을 긍휼히 여기라고 당부하신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심판대에 선 교회를 향해 몇 가지 계명을 어겼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자주 다윗처럼 절망적인 상황에 빠진 이들에게 음식과 무기를 베풀었느냐를 물으실 것이다. 그 옛날 아히멜렉은 계명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고 그 정신을 좇았다. 다윗은 절박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서 도움을 구하라고 충고한다. 본문에서 다윗은 실족해서 넘어졌다. 구석에 몰린 이들일수록 그러기 쉽다. 하지만 올바른 자리를 찾아 쓰러졌다. 하나님이 무력한 인생을 만나서 어루만져 주시는 곳, 바로 주님의 거룩한 성전으로 달아났던 것이다.
--- p. 53-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