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같은 사건을 경험한 후에 다른 반응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위협을 느낄 때 그 상황에서 도망가기도 하고, 상황과 맞서 싸우기도 하고, 전혀 방법이 없다고 느낄 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어떤 식으로든 압도되는 겁니다. 요약하면, 트라우마는 개인의 일상적인 대응 역량을 압도하는 사건, 개인의 신체, 심리, 정체성, 관계의 안녕감과 통합성을 와해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트라우마를 떠올리면서 우리는 과거에 끝난 일인데 왜 여전히 힘들어하는지 걱정하고, 또 자신을 답답해합니다. 트라우마는 기억을 매개로 하는 끝없는 고통의 재생입니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끝났을지라도 사건과 관련된 기억, 몸의 감각, 감정, 생각이 뒤엉켜서 현재에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겁니다. 과거의 교통사고 때문에 여전히 운전을 두려워하고, 가정폭력 가해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왔으나 작은 소리에도 불안해하며 가해자와 닮은 사람만 봐도 소스라치게 놀라는 것은, 과거 기억이 지금도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고 당시 느꼈던 감각이 몸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 pp.23~24
불을 켜고 끄는 온·오프 스위치가 아니라 동그란 버튼을 돌려가며 조도를 조절하는 스위치를 떠올려보세요. 수용과 변화의 극단이 아니라 자신에게 맞는 조도를 찾는 것, 조금 더 밝게 혹은 조금 더 어둡게 조절하는 것이 바로 균형으로 나아가는 방법입니다. 놀이터에서 시소를 타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어른과 아이가 타면 무게가 맞지 않아서 자연스럽게 움직여지지 않지만, 키와 체격이 비슷한 친구와 시소를 타면 오르락내리락 즐겁게 탈 수 있습니다. 시소 양 끝을 수용과 변화라고 본다면, 시소 타기를 하듯 균형점을 찾아가는 게 우리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입니다. 많은 사람이 바꿀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싸우느라 현재를 저당 잡히고 있습니다. 과거에 발생한 일이지만 기억을 통해 영화처럼 반복 재생되는 게 트라우마니까요.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마음으로 체념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현재로 돌아와 변화시킬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며 원하는 삶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제한된 삶, 접힌 신문지를 조금씩 펴가면서 삶을 확장하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 p.58
많은 트라우마 생존자들이 자신이 택했던 대처 방식에 대해 자책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을 살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진 전략으로 스스로를 지켜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과거 위기 상황에서도, 현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생존전략에 대해서도 수용과 변화의 시소 타기를 해보는 겁니다. 우리의 생존 반응이 도움이 되었고 나를 살려주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동시에 현재 내 삶에 효과적인 새로운 전략을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존중한 이후에야, 우리는 비로소 다른 전략으로 바꿀 힘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 감정을 폭발하지 않고 조절하는 방법, 억제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 나에게 관심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방법, 일에 집중하면서 나를 지 키는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pp.78~79
과연 감정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감정은 사전적 의미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했을 때 마음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기분입니다. 즉, 외부 자극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감정은 왜 필요할까요? 우리에게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운전자와 보행자는 도로에서 어떤 기준으로 움직이나요? 바로 신호등입니다. 빨간불일 때 멈춰서 기다리고, 초록불에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빨간색과 초록색 신호등이 우리에게 정보를 주는 것처럼 감정도 우리에게 정보를 줍니다. 신호등이 주는 정보에 따라 움직이려면 각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감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아차리고 그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해야 감정을 조절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 pp.129~130
이처럼 실제 건물의 지도를 보는 것, 일정이 어떻게 짜여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모두 우리를 안심하게 해줍니다. 트라우마 회복 과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트라우마 후유증을 앓고 있다가 치유의 길로 들어서려 할 때, 이 과정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안다면 조금은 안심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트라우마 경험이 다르고 때로는 같은 재난을 겪은 후에도 각각 다른 후유증을 겪지만, 공통되는 회복 과정을 알고 있으면 불안에 떨지 않고 회복의 길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정확하게 진단을 받고, 그 질환의 원인이나 증상에 관해 설명을 듣고, 어떤 과정을 통해 치료되는지 설명을 듣는 것만으로도 막연한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 pp.152~153
안전한 환경을 마련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가해자와 분리되는 것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안정 모두를 말합니다. 여기엔 누구와 함께 생활할지, 누구와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낼지,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할지, 누구와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하고 누구와 거리를 두거나 단절하는 게 좋을지 등의 선택이 포함됩니다. 대인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과 불신 때문에 관계를 단절하거나 피하고 고립되기 쉽습니다. 혹은 극심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되기도 합니다. 반복적으로 대인관계 트라우마를 겪은 생존자에게 안전하고 믿을 만한 관계를 만드는 것은 회복의 중요한 기반입니다.
--- pp.167~168
트라우마 치유를 하며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 안에서 안전하다는 느낌, 즉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과거와 마주할 단계에 도래했다는 뜻입니다. 트라우마 회복의 두 번째 단계는 과거와 천천히 마주하며 트라우마 기억을 ‘처리’하고, 삶의 경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입니다. 즉, 갈기갈기 찢겨 흩뿌려져 있는 기억의 조각을 모아서 삶의 일부로 통합하는 과정이 과거와 마주하는 단계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 p.173
요약하면, 트라우마 회복의 두 번째 단계는 과거를 과거에 두는 과정입니다. 영어 문법 시간에 과거완료, 현재진행형과 같은 시제를 배웠습니다. 트라우마가 현재진행형처럼 현재도 내 삶에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우리는 궁극적으로 과거완료를 추구합니다. 즉 과거에 끝난 사건으로 둔 채 현재로 돌아오는 겁니다. 과거를 과거에 둠으로써 원치 않거나 조절할 수 없는 기억을 피하는 대신,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는 걸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 pp.180~181
많은 생존자가 트라우마 사건을 겪고 불치병에 걸린 것 같다고 말합니다. 긴 시간이 흐르고 트라우마로부터 멀어져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 사소한 일(사실 사소하지 않은 일)이 내 삶을 뒤흔들기도 합니다. 용기 내어 치료를 받으며 일상을 살아갈 힘을 회복했다고 느끼는 순간, 스트레스 사건이나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로 또다시 힘을 잃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나 심리상담소를 반복해서 찾는 경우 절망감이 더 커지기도 합니다. 결국 나아질 수 없는 게 아닌지, 트라우마가 평생 나의 꼬리표가 되는 게 아닌지, 영영 회복 불가능의 늪에 빠진 게 아닌지 불안해하며 좌절합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 트라우마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동시에 일상의 스트레스로 인해 후유증이 재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중요합니다.
---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