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은 쉽게 경솔해지고 모순을 실천하는 신체다. 타인에게는 엄하면서 나 자신에게는 대충 관대해지는 신체가 입이다. 생태와 다양성, 종차별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나의 입으로 여전히 버터가 들락날락한다. 상대적으로 전보다는 확실히 버터 소비를 ‘줄였다’. 그러나 종종 실패한다는 고백을 안 할 수 없다. 이런 내가 비건 지향이 될 수 있을까.
---「버터 좀 주시겠어요?」중에서
환경에 영향을 전혀 주지 않는 것은 없기에, 엄밀히 말하면 모두 정도의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정도의 차이’라는 말의 해석이 결정적이다. ‘오십보백보’라는 속담의 영향 때문인지 기본적으로 다 똑같다며, 소 한 마리 먹는 것과 깨 한 톨 먹는 것을 동률로 보려는 시각이 우리 사회에선 더 일반적이다. 반대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넓고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시각은 의외로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오십 보는 오십 보고 백 보는 백 보다」중에서
우리가 원하는 삶의 방향으로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매번 옳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삶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이기에 완전할 수도, 완벽할 수도 없다. 매번 옳지 못해서 포기하는 것보다는 틀릴 때가 많아도 계속 그 방향으로 향해 가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지금도 어디론가 가고 있을 자신과 누군가를 위해, 속도가 다르지만 힘을 보태는 과정은 필요하다. 죄책감과 진입장벽이 낮아져서 부족해도 노력하는 비건들의 수가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어느 불량 비건의 고백」중에서
답은 가축을 야외에 풀어 키우는 거라고, 유명 셰프나 음식 평론가들이 말한다. 배터리 케이지에 가둬 키운 돼지고기 말고, 방목한 쇠고기나 양고기를 먹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한 가지 재앙을 또 다른 종류의 재앙과 맞바꾸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규모 잔혹 행위 대신 대규모 파괴를 가져올 뿐이다. 축산은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간에 환경에 얼마간의 파괴를 일으키지만, 밖에서 기르는 것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이유는 비효율성이다. 방목은 살짝 비효율적인 게 아니다. 기가 막힐 정도로 낭비적인 것이다
---「고기라는 질문」중에서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나는, 다시 고기를 먹지만 조금은 주저하게 되었고, 먹는 것부터 입고 쓰는 것까지 동물의 희생을 대체할 것이 있으면 비건을 선택하는 비중이 훨씬 커졌다. 야식으로, 주말에 밥하기 귀찮으면, 영화 보면서 입이 즐거울 것을 찾는다는 이유로 심심하면 시키던 치킨은 우리 집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식재료를 다듬다 물컹하는 고기의 느낌에 돼지나 소의 눈빛을 상상하는 순간이, 아무렇지 않을 때보다 많아졌다. 매끄러운 가죽의 질감과 특유의 냄새가 더 이상 좋지만은 않다.
---「비겐의 식탁」중에서
이상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나는 학생들이 어떤 정합적이고 정당한 논리를 통해 내가 육식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유는, 많은 채식주의자와 달리 나는 동물들의 고통에 분명 공감을 하면서도 고기를 여전히 유혹이라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든 육식을 피하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육식이 역겨워서도 아니고, 건강에 해가 되어서도 아니며,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이다. 그만큼 내게 동물해방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으며, 이는 아마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괜히 그 책을 번역해서」중에서
‘회색 채식인’으로서 나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일단 이번 끼니에 고기를 먹느냐 안 먹느냐는 결정은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어떤 타이틀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의 자유의지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내린다. 결과는 같더라도, 어디까지나 먹을 수 있지만 안 먹는 거라는 생각은 내 스스로에게 꽤나 자유와 변화의 여지를 부여하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내린 결정에는 아무런 켕김이나 비굴함이 없게 행동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이다.
---「3분의 1 채식, 누워서 식은 죽 먹기」중에서
비건 활동가들이 건강하고 활기차야 비건 활동가들이 지향하는 가치들도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활기차게 확산될 수 있다. 혹시라도 ‘고기 흉내’ 음식을 먹다가 불편한 증상이 느껴진다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기보다는 좀 더 건강한 채식을 고민해야 한다. 동물과 환경을 위해 본인의 건강을 무시하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탈육식’ 고민과 함께 ‘고기 흉내’를 넘어설 고민도 해야 한다.
---「지속 가능하다, 건강하다면」중에서
채식은 개인에게 갇혀서 작동하는 영역이 아니다. 채식은 계급, 빈곤, 장애, 성별, 민족, 전쟁, 종교, 문화 등 사회의 여러 요소가 매우 복잡하게 작동하는 정치적 영역이다. 채식을 개인의 욕망과 선택만의 문제로 볼 때, 채식 앞에서 각자가 서 있는 불평등한 ‘위치성’은 지워진다! 나는 채식을 하는 이들이 적극적으로 비인간 동물이나 지구와의 ‘연결성’을 고민하듯, 채식 앞에서 자신의 ‘위치성’을 더욱 다층적으로 고민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연결성을 넘어 위치성으로」중에서
나를 어떤 정의된 존재로 구분하게 될 때 우리는 모두 실수하고 자만하기 쉽다. 내 범주에 속한 것 외에는 받아들이지 않게 되며 그 범주 밖의 타자를 우리도 모르게 구분 짓게 된다. ‘비건’이라고 속단할 필요도, ‘비건’이 되기 위해 많은 것을 한 번에 바꿀 필요도 없다. ‘비건’이라서 우월할 이유도 없으며 ‘비건’이 아닌 사람을 가르치려 해서도 안 된다. ‘비건’은 인생의 수많은 선택과 취향, 경험 중 하나다. 나는 슬프고 강제하는 비거니즘보다 즐겁고 자유로운 비거니즘이 좋다.
---「그것은 하나의 문이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