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을음이라 써놓고
그리움으로 읽는다

오래된 바닥에 눌어붙은 불의 기억

닦는다 속살 보일 때
붉어지는 네 낯빛

들썩이는 뚜껑을 슬며시 들추면

일어서는 거품 속에서
소리가 흘러내려

불현듯 나도 모르게
닦아낸 말의 무늬

기울어진 길 위로 타닥타닥 피는 어둠

까맣게 타버린 냄비 속 감자 같은

더 이상 씻을 수 없는
하루를 벗겨낸다
---「냄비」중에서

이파리 파닥이는 소리가 들린다

밑창 떨어진 작업화가 덜렁거리고 매듭 풀린 신발 끈을 힘껏 묶는다 온종일 투덜거리며 소처럼 걷는다 덜컹덜컹 십 톤 화물 트럭이 지나간다 내 걸음을 늦추며 내 손목을 잡으며 컨베이어벨트 위 석탄과 함께 휩쓸려 버린 스물네 살의 청춘이 깜박깜박 띄엄띄엄 SOS 신호를 보내온다 재수 없어 아무도 몰라 싱크홀에 빠졌나? 막막한 생의 깊이를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가 사라진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 아래 어디쯤 가늘고 긴 비명이 통로를 채우며 빠르게 달려온다 오! 신이시여 입안에 핏덩이가 느껴지고, 비린내가 몰려온다 토악질을 견디면서 냄새를 견디면서 풀어진 녹 끈을 힘껏 다시 묶는다 개들이 짖어대고 벌레들이 수군거린다 “너라고 다를 것 같아, 너라고 별수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공중을 울린다 누구도 내 편이 아니라는 것을 벌써 알았지만, 나는 퍼덕거리며 이를 물고 버틴다 조금만 더 손을 내밀면 그의 손을 잡을 수 있겠다 떨어진 번호표를 주워 들고 긴 줄 가운데 아무도 몰래 슬며시 끼어들 수 있을 거다

봄밤에 불 켜고 도는
내 안의 바람개비
---「바람개비」중에서

날 새기 전 추모시를 다 쓰지 못했다
망자의 혼백이 한기를 불렀는지
눈보라 휘몰아친다, 기억의 사각 위에

촛불을 켜려다가 그만 주저앉는다
나는 쓴다, 환각을 착시를 흔들림을
흐릿한 물안개처럼 입김을 내뿜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을까
목소리는 바람 한 점 불러내지 못했고
눈빛은 골목길 안에 토끼처럼 갇혔다

촘촘하게 박히는 이 뜨거운 느낌은
아무래도 여기서 기도를 멈춰야겠다
무엇도 내려오지 않는 막막한 새벽하늘
---「문장을 줍다」중에서

이불 밑에 넣어둔 책을 꺼내 읽는다
용왕의 속앓이가 빈속을 긁어오면
바위에 널어놓았다는 토끼 간이 만져진다

두 눈에 불을 켜고 귀를 쫑긋 세운다
벼랑 위 맨발로 달려가는 젖은 바람
누구의 간을 훔치러 저리 바삐 가는 걸까

오독의 밤은 깊고 눈앞이 침침하다
샛별이 뜨는 시간 타는 듯한 갈증에
끝장을 넘기지 못하고 삼키는 마른침
---「토끼전을 읽다」중에서

돌칼을 만들려고 깨진 돌을 씻는다

깊게 팬 자리에 빗물이 고일 때 돌 가는 소리가 새벽을 깨운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똥별이 떨어질 때 조각난 검은 돌이 서서히 작아질 때 뾰족하게 솟아오른 눈빛과 마주할 때 돌 위에 돌을 대며 매 한 마리 새긴다 닳아 터진 손으로 칼날을 다듬는다

갈아서 다 날리고 남은 내 생의 돌칼 한 자루
---「돌을 갈며」중에서

종이상자는 길 위에서 집이 되었다
장판도 없는 바닥에 곰팡이가 자라고
발바닥 분화구 같은 구멍이 깊어졌다

문패를 대문에 달고 눈물이 차오를 때
늙고 병든 거미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밤마다 그물을 펴놓고 먹이를 건졌다

임성규의 시조집 『바늘이 쏟아진다』를 읽으며 지난 계절 어느 문예지에 실렸던 시조 형식에 대한 첨예한 논쟁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정격에 대한 고수와 형식적 실험에 대한 옹호 모두 각각의 논(論)이 있기에 옳다 그르다를 따지는 일은 이 자리에서 논할 바는 아니다. 다만 분행을 통해 이루지는 시적 긴장과 이완의 문제는 분명 미학적 규명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임성규의 시조도 형식에 대한 고수와 일탈이라는 경계에서 자신의 시조를 꽃피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시집은 평시조 율격을 바탕으로 유연한 형식적 변형과 육화된 사설시조 형식을 통해 시조를 읽는 다양한 맛을 선사해 주고 있다. <br/><br/>시집 전체를 여러 번 읽으며 특이했던 것은 대개 한 권의 시집 속에 있을 법한 작품의 편차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칼을 오래 다룬 장인이 칼을 다루듯 일관된 시정신이 고루 배여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이 시집 전체를 압도하고 있는 것은 선연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시학에서 애매성이란 의미 해석의 다양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이를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방법이 이미지의 구현일 터이다. 그러한 점에서 임성규의 시조가 가진 현대성은 이 지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br/><br/>달리는 차 뒷바퀴에 고양이가 치였다<br/><br/>길 너머에는 꽃잎이 떠가는 개울이었다<br/><br/>두 눈에 산 그림자가 하늘하늘 떠 있었다 <br/>― 「로드킬」 전문<br/><br/>거리에서 죽음이라는 하나의 상황이 제시된 이 시에는 선명한 이미지가 아로새겨 있다. 그러나 전문에는 시적 화자가 지향하는 어떤 의미망도 찾을 수 없다. 차에 치인 고양이와 꽃잎이 떠가는 개울 그리고 죽은 고양이 눈에 서린 산 그림자가 이 시의 전부이다. 이 시에서 어떤 의미망을 찾는다면 그것은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다. 끝내 길 위에서 죽어가야 하는 존재의 비애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가장 큰 울림은 어떠한 가치의 판단도 배제한 채 그리고 있는 죽은 고양이의 눈에 비친 “산 그림자”이다. 모든 해석의 몫을 독자에게 돌려주는 이러한 방법론은 이 시집 전체에서 관철되는 시적 장치인 셈이다. <br/><br/>슬픔이 바닥을 쓸고 오는 소리 듣네<br/><br/>멈추지 마 <br/><br/>소리치고 망설이는 저 떨림을<br/><br/>어쩌지 <br/><br/>휘어진 어깨에 <br/><br/>내리는 <br/><br/>흰 재는<br/>― 「아버지의 붓」 전문<br/><br/>“슬픔”이라는 관념마저 감각적 이미지로 변환시켜 놓은 이 시 역시도 구체적 의미를 드러내는 것을 극히 삼가고 있다. 아버지가 붓글씨를 쓰는 행위를 고도의 감각으로 그려놓을 뿐이다. “멈추지 마”, “어쩌지”와 같은 의미가 고인 시어들조차도 “휘어진 어깨에//내리는//흰 재”라는 이미지로 수용되어 아버지의 전 생애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활용되는 것이다. “휘어진 어깨”, “내리는”, “흰 재” 등은 아버지의 이미지에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것으로 인지되기 십상이지만 그것들이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었을 때 독자의 감각의 촉수는 미묘한 비극성과 더불어 정신적 견인주의를 만나게 된다. 비단 위에 인용한 두 작품뿐만 아니라 많은 시편에서 제목은 시의 의미망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시의 한쪽 날개인 셈이다. 감각적 이미지를 통한 시적 형상화가 대상을 표현하는 주된 방법론이라면 투철한 내면적 결핍에 대한 응시는 자기 정체성과 관련을 맺고 있다.<br/><br/><b>시인의 말</b><br/><br/>쏟아지는 햇살을 눈감지 않고<br/>볼 수 있다면……<br/><br/>눈앞이 깜깜해질 때마다<br/><br/>초록 잎을 눈에 댄다.<br/><br/>2023년 11월<br/>임성규<br/><br/><B>시인의 산문</b><br/> <br/>박스에 테이프를 붙인다.<br/><br/>속이지 말라고 소리치는 저울 앞에서<br/>빠르게 포장하는 손이 떨린다.<br/><br/>위대한 건 다 안에 있다고 우겼다.<br/><br/>그러다 포장이 뜯긴<br/>내 하루가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