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 베토벤의 사랑과 열정을 담은 편지선집
--- 00/2/17 이상구(flypaper@yes24.com)
작가 신경숙을 우리네 곁으로 선뜻 다가 서게 했던 작품 <풍금이 있던 자리>는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단편소설 그 자체가 한통의 편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가만히 그 내용을 뜯어 보면, 가정을 가진 유부남을 향해, 순박하고 감수성 예민한 여자가 보내는 고도로 농축된 자기고백에 불과한 뻔한 신파조의 멜러드라마일 뿐인데....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는 결코 유치하지 않은, 애틋한 울림을 지니고 많은 독자들의 가슴 한켠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는다.
왜 그럴까? 저마다의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친근하고 범용적으로 독자들과 공감할 수 있는 문학 형식인 편지글이라는 옷을 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내면과 뻔뻔하게(?) 소통할 수 있고, 스스로를 자극하고 반성케 할 수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숱한 감정을 자분 자분 정리하여, 그네들로 하여금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인식케 하는.. 연서(戀書)의 힘을 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확실히 편지란 정제된 내면의 울림을 가능케 한다. 그르니에와 카뮈가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주고 받았던 그 숱한 문장들이 그랬고, 기벽과 광기의 화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냈던 인간적인 메시지가 그랬다. 먼 이국땅 독일에서 여동생 채린에게 전달 됐던 전혜린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감수성이 그랬고, 엉뚱하게 잘못 전달된 러브레터의 행복한 상상력이 그랬다. 이제 그 기나긴 연서의 대열에 또 하나의 책이 추가된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생생한 육성을 담은 편지선집이 바로 그것이다.
지상의 소리를 천상의 음악으로 승화시킨 악성(樂聖) 베토벤은 1827년에 사망했다. 비엔나 전체는 슬픔의 도가니에 빠지고, 수천명의 군중들이 베토벤의 장례 행렬을 지켜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그의 생이 끝나는 순간이었고 또 다른 전설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베토벤의 오랜 친구인 안톤 쉰들러는 의문점을 풀기 위한 조사를 시작한다. 그 이유는, 베토벤의 말년에 그를 돌보았던 막내 동생 요한에게 모든 베토벤의 유산이 상속될 것으로 기대되었으나 베토벤의 유언장은 모든 것을 '영원한 연인' 앞으로 남긴다고 했다. 그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쉰들러는 친구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 그녀를 찾아 나선다. 그가 가진 유일한 실마리는 이름모를 여인에게 베토벤이 보낸 편지가 전부였다.
캔디맨의 절대공포를 만들어 냈던 감독 버나드 로즈의 영화 <불멸의 연인>의 도입부이다. 영화가 베토벤의 숨겨진 로맨스를 중심으로 엮어진 센세이션한 러브 로망에 가까웠다면, 이 책은 베토베의 인간적인 모습에 보다 큰 초점을 맞춘다. 베토벤의 숨겨진 <불멸의 연인>을 향한 연서 뿐만 아니라, 그를 이해하고 심지어는 오해했던 수많은 지인들, 그리고 동생과 후원자에게 보낸 100여편의 생생한 울림의 편지를 모아 수록했다. 여기에는 정작 자신은 공개되기를 원치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극히나 개인적인 일기와 메모도 포함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한 평전의 형식을 통해서는 결코 맛 볼 수 없는 진심어린 고백을 맛볼 수 있으며, 그의 대표적 명곡들을 수록한 부록 CD를 통해 인류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칭송받는 베토벤의 시대 정신과 음악에 대한 열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베티나, 사랑스런 아가씨! 예술! 누가 이것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하리요. 이 여신의 위대함에 대하여 누가 떠들어댈 수 있겠소.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또 의견 일치를 보았던 며칠 되지 않은 그 날들은 내게는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었소. 나는 당신의 재치 있고 사랑스러운, 진실로 사랑스러운 대답의 기록을 모두 간직하고 있소. 휙 지나가버리는 대화를 기록으로 남기게한 데선 어쨌든 내 나쁜 청력 덕을 보는구려. 당신이 떠나버리고 난 후 나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소. 암흑 속에서 지내는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소. 당신이 떠난 후 쇤브룬 거리와 성벽을 꼬박 세 시간 동안 헤매고 다녔지만 나를 지탱해줄 당신 같은 천사는 만나지 못했다오. (p.128)
베토벤의 일대기를 관통하는 격렬하고 아름다운 음악과, 인간적인 고뇌로 뜨겁게 타올랐던 사람에 대한 열정과 천재 음악가의 고독한 삶, 그리고 한 여인을 향해 남몰래 불태워진 격정적이고 아름다운 불멸의 사랑을 밀도 있는 언어로 만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