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탄생을 만들기 위한 산고로서의 죽음
--- 99/11/21 조창완(chogaci@hitel.net)
김명인은 나에게 영원히 '화엄에 오르다'의 시인일까 싶다. 그의 시집 '물 건너는 사람'을 읽을 때, 그의 기호들은 온전히 나에게로 와서 녹았다. 하지만 서서히 그의 시편들은 나의 기호권 밖으로 흘러나갔다.
나에게는 시간이 흐를수록 가까이 가는 시인들이 있고, 더러는 처음에 가깝다가 멀어지는 시인이 있다. 더러는 포물선을 그리고 내 관심권에 있는 시인들도 있다. 시란 장르가 생래적으로 독자들과 다양한 거리를 형성하고 있으니, 내가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김명인은 어쩌면 나에게 있어서 포물선 모양으로 다가온 시인이다. '동두천'을 읽었을 때는 그저 평이하게 다가오다가 너무나 빨리 선(禪)에 들었던 시인. 그 시인은 그 선을 나에게 풀어주지 않는다.
'바닷가의 장례'부터 나와의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길의 침묵'에서도 여전하다. 전 시집도 그런 것 같은데 시인이 가장 많이 다루는 '죽음'인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라는 기호는 새로운 탄생을 만들기 위한 나름대로의 산고라는 추측을 해본다.
지금 그의 시가 가지고 있는 화두를 나로서는 찾을 수 없다. 죽음을 넘어 무엇이 있는 지 모르겠다. 다만 그는 세상의 복잡한 모습들을, 특히 죽음을 예민하게 관찰한다. 관찰하지만 마음속에는 또 다른 우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나야할 '바위꽃이 열어놓은 문'(서문에서)을 찾는 흔적이 역역하다.
그가 던지는 죽음의 향기를 맡아보자. '제 살던 우리에서 멀어질수록 질주하고 싶다는 생각이 /갑자기 앞차를 앞지르지만/시야 가득히 열려오는 것은 죽음의 / 저 환한 길 끝'('트럭에 실려가는 돼지'중에서), '내 사랑, 그때 그대도 한 줌 재로 사함받고/ 나지막한 연기 높이로만 흩어지는 것이라면 / 이제, 사라짐의 모든 형용으로 헛된 / 불멸 가르리라'('다시 바닷가의 장례'중에서), '모든 처음 앞에 젖어드는 죽음의 누추함이란!/ 몸 속은 물길보다 더 깊어서/내 작은 비유의 피라미들 물살을 헤치며 잘도/ 거슬러 오른다//... 근원이었던 싱그러움, 번져나간 파문에 대하여/비로소 노래하련다, 강물은 끊임없이 / 저쪽 능선을 둘러 바다로 흘러갈 것이다'('순결에 대하여'중에서)
이 시집에서 굳이 죽음이라는 단어를 찾을 필요가 없다. 시의 도처에서 죽음을 중심소제로 한 시를 만날 수 있다. 그가 죽음을 왜 중심에 다루었을까. 죽음이 생명이라는 것을 성서적 비유를 통해 구차하게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인용된 시중에 '순결에 대하여'는 시인이 죽음을 이야기하는 이유를 살짝 드러낸다. 뒤에 인용된 '근원이었던 싱그러움'. 시인은 지금 모두의 근원에 있는 생명력을 찾고 있는 어려운 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천명의 나이를 넘은 시인이 나름대로의 답을 찾아낼지는 모른다.
그의 시가 보여줬던 깊이를 기억하기에 여전히 기대를 한다. 그래서 이 시집에서 가장 번득이는 구절은 이것이었다. '그러므로 고통을 보람으로 바꿔 안는 사랑은, / 생을 저 적멸의 가장자리로 옮겨놓는 죽음은, /얼음을 시냇물로 풀어놓는 봄빛은, // 그가 왜 주검 자리에서 수 많은 /수정꽃 다발째 받아야 하는지, / 썩는 살을 쓸어내고 썩지 않는 흙더미를 받고 있는지// 모든 얼룩은 이미 제 속으로 결이 환하다'('우리도 저 산 가까이 갈 수 있을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