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보다 짧고, 시처럼 함축적인 이야기
찰나적 문학, 미니픽션의 미학
미니픽션은 단편과 비교하더라도 찰나적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문자 메시지로 즉각 전달하고 답신을 받는, 우리 일상의 리듬에 부응하는 문학이다.
그러나 미니픽션도 문학인 이상 허구성과 서사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매우 짧다는 특성은 단편과 미니픽션을 근본적으로 가르는 요소이며, 미니픽션을 독자적인 장르로 규정할 수 있는 핵심이다. 요약하면, 미니픽션은 분량이 매우 짧고, 허구성과 서사성을 갖춘 문학이다.
간결한 허구로서의 미니픽션은 전후사정을 고려하지 않고 일상을 파고들어 우리를 잠시나마 다른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 미니픽션 선집은 갖가지 술처럼, 텁텁하고 둔중한 맛을 내는 작품도 있고 명징하고 예리한 맛을 내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어느 잔을 들어도 하나같이 문학적 전율이 넘쳐흐른다. (박병규, 서울대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 서문 중에서
몽상가들의 낙원이라는 물의 도시를 생각한다. 몽상가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노래를 하고 사랑을 한다. 해 질 녘, 잠에서 깨어난 이들은 다시 술집에 나와 시를 쓰거나 편지를 쓴다. 그리고 노래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랑을 한다. 어제의 연인은 이미 잊었다.
또다시 그 낙원을 꿈꾸며 오늘 밤 술집[酒集]에 들어 술꾀[酒術]를 부린다. (김민효)
바위를 들어 옮기기보다는 작은 돌을 집어 여기저기 던져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큰 그림을 그리기 전 여러 장의 작은 드로잉을 하는 것도 같은 즐거움이다.
공연히 바쁜 삶 중에 반칙이라도 하듯 억지 시간을 내어 틈틈이 잔술도 먹는다. 남의 술, 내 술 가리지 않고…. 그 술들의 사연이 만들어낸 짧은 글 조각들. 미니픽션이라는 것. (김의규)
늘 쓸쓸하기만 했던 겨울 풍경, 울음을 삼키며 넘어가던 해 지는 풍경, 도망가고만 싶었던 '아버지의 술', 눈에서 머물다 눈물이 되었던 일들이, 이제는 가슴의 눈에서 그리운 셔터를 눌러대고 있다. (김정묘) --- 작가의 말 중에서
오늘… 한 잔 술이
그대의 먼 사랑보다 따뜻하다
휴대폰을 뒤적거려본다. 부재중 통화 내역을 확인하고 수신된 문자 메시지를 다시 살핀다. 없다. 컴퓨터를 켜고 메일 박스에서 받은 편지함을 열어본다. 없다.
오래 전에 수신된 메시지를 다시 읽는다. 하트로 그린 하트. 하트의 개수를 센다.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하트를 ‘사랑해’로 바꾼다. ‘사랑해’가 수북해진다. 그의 외투를 꺼내서 어깨에 걸친다. 그래도 춥다.
달력을 본다. 삼월의 달력 속에는 활짝 핀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숨죽인 바람으로도 화르르 꽃이 질 것처럼 환하고 위태롭다. 이미 지나간 삼월. 삼월을 쭉 찢어낸다. 찢어낸 시간을 깔고 앉아 술병을 연다.
그의 먼 사랑보다 소주 한 잔이 더 따뜻한 저녁, 겨우내 살 냄새를 저장시킨 외투가 안줏거리로 구워진다.
봄날이 있긴 있었나? 달력을 깔고 앉아서도 봄을 읽지 못하는 몸뚱어리, 여전히 겨울 속이다. 푸른 소주병 속으로 몸을 밀어 넣는다. 따뜻해지는 몸뚱이, 환해지는 기억, 봄의 온전한 가슴이 울타리가 되고, 외투가 되고, 포근한 내의가 된다.
봄날 편, 벚꽃 만개한 달력 위에서 밑바닥 불안한 술병이 휘청거린다. 여전히 날 세운 바람이 불고 술잔 속으로 벚꽃이 진다. (김민효 "봄날은 없다")
--- 본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