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 선생’
아닌게 아니라 내가 『임꺽정』을 연재할 때 집안에서도 그런 오해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소시 때에 당해 보도 못한 연애 장면을 땀을 빼다시피 하고 이리 궁리 저리 궁리 해서 쓴 것인데, 아 어느 날인가 내가 방에서 듣자니까 둘째 아들 기무가 하는 말이 “어머니, 아버님이 집에서는 대범하시기 짝이 없으시지만 밖에서는 실없는 일을 많이 하시는 모양이지요!” 합디다그려. 그때에 내 아내의 급히 나온다는 대답이 걸작입니다. “아, 참, 그렇드라 얘. 아마 다른 여자와 그렇게 해보신 일이 있기에 그럴듯하게 잘 쓰시는 것이지?” 하는 것이 매우 의심에 싸인 말투였어요. 내가 밖에 나간 줄들만 알고 크게 맘놓고 떠들다가 그만 내 기침소리에 혼들이 났지요. 그런데 이런 일화가 세간에 알려져, 짓궂은 젊은 문인들은 내게 늦바람이 났다고 ‘만풍(晩風)선생’이라는 별호를 붙이기까지 했다오. (웃음)
--- p.26
진취적인 여성관
홍명희는 그 세대의 남성들 중에서는 예외적일 정도로 진취적인 여성관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운동의 단일전선인 근우회가 창립했을 때 홍명희는 『동아일보』「일인일화(一人一話)」란에서 「근우회에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근우회에 대해 각별한 기대를 표명하는 발언을 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완전한 합리적 인류사회에는 여자가 남자와 같이 정치적·문화적으로 활동할 균일한 기회를 가질 것입니다”라고 하여 남녀평등에 대한 확고한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우리 조선은 현금(現今) 세계 선진국에 비하여 후진이라 모든 것이 남에게 뒤진 중에 여성운동 같은 것은 더욱이 뒤진 것의 하나입니다”라고 여성운동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이어서 “지금 우리 조선에는 크룹스카야가 구우즈나 크라프트와 같이 활동하게 된 판입니다”라고 한 대목을 보면, 그가 서양 여성운동의 역사에도 상당히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물론 19세기 말에 태어난 양반 출신 남성인 홍명희가 콜론타이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여 1920년대 조선의 일부 사회주의자 청년 남녀들처럼 성적인 자유 방종을 찬성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성의 정조를 극도로 중시하는 봉건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자유연애를 지고의 가치로 예찬하는 당시 지식인 남녀들의 풍조에 대해서도 일정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 p.161-162
“예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홍명희는 본래 조용한 가운데 퍽 유머러스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역사소설 『임꺽정』을 위시하여 그가 남긴 각종 글과 대담기들을 보면 구수하면서도 차원 높은 유머를 구사하는 홍명희의 인간적 풍모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러한 홍명희조차도 일제 식민통치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날로 악화되는 정국 속에서 우울하고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는 동안 내심 초조하고 울적한 심사를 억제하기 어려웠던 듯하다. 『조광』 지에는 각계 명사들에게 장난조의 질문을 몇 개 던져 재치 있는 답변을 유도하는 ‘명사 만문만답(漫問漫答)’이라는 난이 있었는데, 홍명희는 편집자의 요청에 마지못한 듯 짤막한 답변을 한번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중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홍명희는 “증오감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예쁜 것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답하고 있다.
--- p.224
해방 직후 이태준, 이원조, 김남천과의 문학대담에서 홍명희는 “이러나 저러나 방응모 씨와 홍순필 씨가 자꾸만 『임꺽정』을 끝내라 조르지만 임꺽정이가 독립 후인 오늘날도 내 뒤를 따라 다닌대서야.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악처럼 『임꺽정』도 그만하고 미완성인 대로 내버려두었으면 좋겠어!”라고 농담조로 말하여 일동의 웃음을 자아냈다. 그리고 거작 『임꺽정』을 완결하지 않는 데 대해 이태준이 거듭 안타까움을 표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는 민족사의 새 시대를 맞이하여 더욱 중요한 과업에 힘써야 하는 만큼 『임꺽정』의 완성에 힘을 기울일 뜻이 없음을 내비쳤다. …… 홍명희는 본래 지극히 겸허하면서도 남달리 눈이 높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집필한 『임꺽정』조차 스스로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었다. 후배 문인들이 『임꺽정』을 예찬해도, “『임꺽정』에야 묘사다운 묘사가 있나 어디”, “문학작품으로는 저급이지” 하는 식으로 스스로 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그는 여느 문인들과 달리 작품을 기어코 완성시켜 불후의 명작을 남기겠다는 작가적 공명심조차 전혀 없었던 것 같다.
--- p.27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