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속 학생들의 관심사도 달라졌다. 돈 공부를 하지 않는 개인의 나태함과 어리석음이 의문과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점점 가난과 빈곤이 개인의 책임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쉬는 시간에 다가와 나에게 비트코인과 테슬라 주식을 샀냐고 질문했다. 선생님도 비트코인과 테슬라 주식을 사면 부자가 될 수 있고, 빨리 은퇴해 ‘파이어족’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학교에서 학생들과 씨름하며 힘들게 노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학생 나름의 걱정이었다. 변하는 학생들의 이야기는 곳곳에서 들려왔다. 한 교사의 이야기를 블로그를 통해 접한 것도 그쯤이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소재로 수업한 뒤 학생들과 토론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모둠의 학생들이 개발업자에게 속아 입주권을 시세의 반도 안 되는 가격으로 판 ‘난장이’ 가족을 향해 ‘시세를 파악하지 못한 난장이 가족이 어리석다’, ‘난장이 가족이 잘못했다’ 등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 p.21-22, 「김형성, 〈‘돈 되는 교육’과 ‘돈을 위한 교육’을 넘어〉」 중에서
학교의 한쪽에서는 아이들의 도박 중독이 우려된다며 예방 교육을 의무화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주식과 부동산 투자 관련 교육이 필요하다고 아우성친다. 아무리 도박은 불법이고 주식과 부동산 투자는 합법이라고 해도, ‘돈 놓고 돈 먹기’라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거칠게 말해서, ‘투자’와 ‘투기’처럼 둘 사이는 ‘깻잎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도박 중독 예방 교육이든, 주식과 부동산 투자교육이든, 이를 통해 아이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건 단 한 가지다. 바로 돈이 인생의 전부라는 것! 돈이 없으면 주위로부터 업신여김당한다는 세태를 자연스럽게 체득하게 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큰돈을 쉽게 벌 수 있는지를 가르치면서 도박은 안 된다고 하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
--- p.43-44, 「서부원, 〈계속 탐욕적 인간을 길러 낸다면 미래는 잿빛일 것이다〉」 중에서
‘세금 내는 아이들’ 수업을 들었다면 이걸 알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 수업은 ‘세금 내는 아이들’이지 ‘복지 급여 받는 아이들’이 아니다. 요즘 초등학교에서 기초 생활 수급자는 ‘기생수’라는 약칭으로 불린다는데, 어감상 ‘기생충’을 떠올리게 한다. 그럴진대 학교에서 ‘기생수’ 되는 법을 가르친다? 학부모들이 항의 시위를 하고도 남을 일이다.
하지만 진짜 ‘생존경제교육’은 이런 것이 아닐까? 생존의 위기에 내몰렸을 때 기꺼이 자신의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사회가 함께 덜어 달라고 청하는 법을 배우는 것, 이것은 마치 불이 났을 때 119에 전화해야 한다는 것처럼 기초적인 상식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p.60-61, 「하금철, 〈‘초라한 경제교육’을 위하여〉」 중에서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고 사회의 경제 활동과 의사 결정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그러니까 경제 시민으로서 자신의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제안하지 않은 나 자신에게 교사로서 너무 큰 아쉬움이 들었다.
정치교육에서 학생들이 학생이자 유권자이며 곧 시민이듯, 경제교육에서도 학생들은 경제 시민이다. 즉, 경제교육에서 학생들은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라는 사회 영역에서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이며,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부분에 어떻게 개입하여 자신의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실제로 권리 행사의 경험을 보장받아야 한다.
--- p.68, 「진냥(희진), 〈지금의 경제교육 논의가 놓치고 있는 것〉」 중에서
교실을 작은 국가로 만들어 어린이들이 직업 활동과 투자 활동을 통해 돈의 흐름과 투자 원리를 익히도록 한다는 그 사례는 ‘살아 있는 경제교육’의 모범 사례로 회자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미 현실이 이러한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과연 ‘자치와 자급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인가를 물었고, 다른 누군가는 알아 봐야 나와 상관없는 세상인데 그렇게 안 살기로 한 바에야 아예 모르는 편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공부 모임은 투자 실무는 아니지만 자본주의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 공부는 한다. 그건 우리의 자치와 자급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알아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아마 진보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 온 많은 교사와 학부모들도 이런 지점들이 혼동될 것이다.
--- p.91, 「채효정, 〈자본주의 경제교육을 넘어선 경제교육은 가능한가〉」 중에서
이런 경제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경제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는 것이다. 계획 경제도 사회주의 경제도 실패한 것으로 규정되어 왜 실패했는지를 성찰하며 다시 도전해 볼 기회조차 박탈해 버린다. 시장은 제2의 자연처럼 주어져 있는 것으로 전제되어 개혁도 개선도 그 안에서만 가능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제에 대한 이런 인식은 전前 자본주의 단계에서 나타났던 수많은 연대적 민중 경제의 양식들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자본으로부터 탈주하는 다양한 대안 경제들을 보지 못하도록 한다.
무엇보다 시장 경제 시스템이 영원히 작동할 것을 전제한 금융·투자교육은 기후 위기 시대에 요청되는 생태교육-전환교육과 정면 배치된다.
--- p.98-99, 「채효정, 〈자본주의 경제교육을 넘어선 경제교육은 가능한가〉」 중에서
금융 투자가 유행이고, 경제 현실을 각색해 교실(수업) 모형으로 재현해 내는 교사들이 늘고 있다. 이런 현상에 한쪽에서는 열광하고, 반대 편에서는 큰 우려를 보인다. 나는 후자인데,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암울한 전망이다. 숨 막히는 국가 관료제의 폐쇄성이 의도치 않게 방어막을 만들었던 걸까? 이재를 밝히는 사람에 대한 도덕적(봉건적) 손가락질에 눈치를 보는 문화가 이어져서 그런 것일까? 교육에 대한 자본의 관여가 전에는 그나마 점잖은 편이었다.
이제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교육 분야 침투는 더 노골화되고 있다. IMF 외환 위기 이후에 미국식 자본주의를 속수무책으로 받아들이게 되면서, 특권 학교(자사고, 국제 학교)가 유치되었고, 교육과정에는 ‘금융과 투자’ 단원이 들어왔으며, 교육의 다양화·전문화·유연화 논리로 비정규 교사들은 늘어났다. 더 근본적으로 교육 관계의 시장화, 즉 교육 서비스 공급자(교사)와 수요자(학생, 학부모) 관계로의 변화가 진행됐다.
--- p.109-110, 「서재민, 〈이런 경제 교과서로는 시민이 탄생할 리 없다〉」 중에서
교육은 자신의 삶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나 자신의 삶과 우리 가족의 삶,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 다시 자신의 삶에 대해 가치와 방향을 고민토록 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 교육은 삶의 모습을 담아내지 못했다. 아니, 자신과 부모의 삶을 부인하고 거부하게 만드는 교육을 해 왔다. 그 삶은 ‘일’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시 말해 거의 대부분의 삶은 ‘노동’을 기반으로 이루어지는데, 우리 교육에서 노동은 없었다.
--- p.130-131, 「장윤호, 〈학교에서 제대로 된 노동교육은 가능할까〉」 중에서
사회적 경제는 구성원 간의 협동과 상생을 통하여 개인과 공동체 모두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시장 경제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다. 또한 이기적인 인간이 아닌 이기적이면서도 이타적인, 즉 상호적인 인간을 가정함으로써 전통적인 경제학에서의 ‘합리적 인간’을 반박한다. 민주 시민 양성을 목표로 하는 교육에서 상호적인 인간을 가정하고 협동과 상생의 전략을 추구하는 사회적 경제는 많은 부분 그 지향을 공유한다.
--- p.148-149, 「진냥(희진), 〈사회적경제교육이 자본주의 교육의 대안이 되려면〉」 중에서
노동을 교육하면서 노동의 위계를 매일 겪는 지금의 학교에선 결국 자본주의적인 취업 교육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돌봄의 행정을 학교가 할 것이냐, 교육청이 할 것이냐를 두고 싸우며 돌봄과 교육을 나누려 하고, 학교 비정규직 노조의 파업에 연대하지 않고 오로지 수업만이 학교의 중심인 것처럼 행동한다면, 학생들 또한 학교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파업을 자기 수업을 방해하는 행위로 바라보게 될 것이다. 누구를 ‘선생님’이라고 부를지, ‘교사’라고 볼지에 대해 논하며 ‘진짜 선생님’, ‘진짜 교사’의 정의를 찾으려고 하는 교사들에게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전문직 노동자와 육체 노동자에 관한 차별적 시선일 것이다
--- p.166, 「이윤승,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고 부끄러움 없이 말하고 싶다〉」 중에서
사실 최근의 교과서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생태·인권·평화·노동의 시각을 고루 담고 있다. 10~20년 전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민주주의에 관한 내용도 담고 있다. 오히려 우리 사회와 성년들이 교과서의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왜 학생들은 그렇게 성장하지 못하는 걸까?
교육과정에서 민주주의·생태·인권·평화·노동을 이야기해도, 학생들은 그건 교과서 안에나 있는 이야기이고, 현실은 경쟁에서 무조건 이겨야 하고 결과적으로 성적에 따라 차별과 배분이 이루어지며, 개인에 대한 통제를 받아들이는 게 이롭다는 것을 아주 영악하게 눈치챈다. 교과서보다 더 강력한 것, 교사의 말보다 더 진실된 것, 학생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학교의 시스템으로부터 학습한다. 학교라는 공간의 총체적 경험, 바로 잠재적 교육과정이다.
--- p.173, 「이영주, 〈학교라는 반노동적인 공간에 대한 탐구〉」 중에서
왜 학교는 금융을 가르치며 기업과 자본가, 은행의 이야기들을 주로 가르칠까. 어쩌면 교사 스스로도 노동자의 정체성보다 기업과 자본가의 정체성을 더 많이 투영하고 있기에 그런 것은 아닐까. 비록 임금을 받고 있는 노동자이긴 하지만 자신들의 미래의 모습으로 노동자의 삶보다 자본가의 삶을 그리고 있기에. 실제로 얼마나 많은 교사들이 죽기 전에 임대 사업자가 되거나 건물주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 주위의 많은 교사가 퇴직 후에 노동 없이 지속 가능한 수익원을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 p.191, 「이윤승, 〈막아도 들려오는 ‘돈벌이’ 소리〉」 중에서
교육을 통해 단순히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에 멈추지 않기 위해서는 현재의 현장 실습 제도 및 직업계 학교 운영 체계가 전면 수정되어야 한다. 진학이 아니라 취업을 선택한 학생들이 스스로의 결정을 존중받는 문화 속에서 값싼 노동력이 아니라 정말 필요한 노동자가 될 때까지 충분히 필요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보장하고, 자신이 원할 때 원하는 곳으로 취업할 수 있도록 학교와 국가가 최선을 다해 지원해야 한다. 학생으로서 권리를 보장받고 존중받았던 경험을 갖게 하고 부당함에 대해서는 언제든 말할 수 있다는 감각을 길러야, 노동자로서도 권리 침해에 맞설 수 있을 것이다.
--- p.213, 「박내현, 〈한두 번 교육한다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될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