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1월 27일 오전 8시 30분.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최초로 1백만 명 선을 넘었다. 1백만 번째로 우리나라 땅을 밟은 관광객은 오전 8시 반 미국 로스앤젤레스 발 KAL 005편으로 김포공항에 내린 미국인 바버라 리 존슨 부인(59,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 거주)이었으며 같은 비행기로 온 존빈 크너슨 양(23, 미 애리조나 주 거주)과 야산 아나우드 씨(34, 미국인, 무역업)는 각각 1백만 째 전후의 입국자가 됐다. --- p.9
다나카가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새크라멘토 시에서 네 자녀와 손자 아홉을 두고 한 명의 한국 고아를 8년 전부터 후원하고 있는 존슨 부인은 남편이 6.25 참전 용사로 한국과 인연이 깊어 관광 차 일주일 예정으로 입국했다. 손자가 아홉이라고. 이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응? --- p.10
다나카는 김신에게 편지를 읽듯 말했고 이것은 자신이 미국의 어느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남자의 일생을 소설을 쓸 요량으로 극화한 것인데 이미 너에게 말해 버렸으니 나는 소설을 쓸 수 없다, 어떻게 할 것이냐, 라고 했다. 왜 쓸 수 없냐고 김신이 묻자 다나카는 소설은 일종의 마법과 같아서 발설하면 기운이 빠진다, 내면의 두께가 소진되어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 p.20
다나카는 올해도 지하철 공사를 하느라 출장을 다녔다. 지하철도영단에서 출간한 『지카테쓰토 셋케이』를 옆구리에 끼고 서울, 타이베이, 뉴델리, 바르샤바.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도시 지하에 또 하나의 세계가 생기고 있어. 뉴욕의 버려진 지하철 정거장에는 귀신이 산다고 하는데 귀신이 살고 있으면 그 귀신은 더 이상 귀신이 아닌 걸까, 그런데 그런 소문은 지하에 사는 노숙자나 사회 부적응자들을 보고 착각한 것인데 지하에 사는 사람들을 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까, 지옥이 지하에 있는 건 내려가면 알게 된다, 공기의 무게, 암반의 색조, 중심에서 울려오는 고요한 음성, 그건 맨틀이 움직이는 소리일까. --- p.23
김신은 딱 한번 지하철을 타봤다. 이제 서울에 가면 매일 타는 거? 동대문에서 시청으로, 시청에서 종로 5가로. 그렇지만 조금 무섭다. 땅이 무너지면 어떡해? 김신은 불안에 떨었고 다나카는 땅 위로 다녀도 땅이 무너지면 다쳐, 아…… 김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이젠 땅 위로 다닐 때도 불안하겠네. 그래,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 다나카가 말했다. 불안은 현상이 아니라 심리야, 그러니 더 이상 아무것도 불안해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불안하지 않을 거야. --- p.26
대한 뉴스에서 바버라 존슨이 상을 받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을 봤다. 정장을 입은 공무원이 바버라 존슨과 아서 존슨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섰다. 아서 존슨은 대머리였고 안경을 쓰고 있었다. 콜라를 마시는 미셸 푸코 같아요. 아서 존슨의 사진을 본 상우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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