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 있어
저 푸른 잎 속에
우리에게는 한없는 내일이 있어
이 멋진 젊은 날
너도 나도 젊어
아아 우리는 내일을 향해
이 아찔한 청춘을 살아가자
--- p.13, 「18세」중에서
오월의 비가 학교 탱자나무 울타리의 어린 이파리를 적시고 있다. 탱자나무의 여린 가시가 우산 끝에 걸렸다. 부드러운 황록색 이파리가 내 우산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에 파르르 몸을 떤다. 손을 내밀어 천이 찢어지지 않게 가시를 떼어내자, 이파리와 나뭇가지에 머물러 있던 빗방울이 내 손목으로 주르륵 흘렀다.
--- p.27, 「18세」중에서
드럼은 몇 억 광년 전의 관대함을 칭송한다. 매머드가 들판을 위풍당당하게 걷던 시대는 좋았다. 벽에 기대어 두 명의 이름을 새겼다. 베이스가 벽 너머에서 붕붕 피를 보내고 있다.
--- p.51, 「Jazz」중에서
빛이 거리를 뒤덮고 있다. 인간이라는 생물의 한탄 부호가, 인파 속으로 사라진다. 절대 무한은 저 비트족에서 발생했다.
비 개인 낮, 보도가 빛의 띠를 만들며 빛난다. 떨어지지 않은 고엽이 빗방울을 머금고 바람에 흔들린다. 멀리서 전철이 지나갔다. JAZZ의 울림을 희미하게 남기고, 나는 인파 속을, 역을 향해 걸었다.
--- p.56, 「Jazz」중에서
우쭐거리며 말하는 다카오를 빤히 쳐다보고, 그리고 ‘톰’의 벽에 걸린 피그미족 제사용 가면의 눈을 쳐다보고, 바지 주머니에 조용히 숨어 있는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미쓰코가 성냥을 긋는다.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떤다. 성냥에 붙은 불을 쳐다보면서, 나는 다카오와 그녀의 동반자살미수업이라는 사업의 내용을 상상하느라 불 붙이는 걸 깜박하고 말았다.
--- p.68, 「다카오와 미쓰코」중에서
“이거, 블랙 유머라고 해야 하나.”
나는 병실 앞에 멀거니 멈춰 서고 말았다. 만약 이것이 그로테스크한 유머라면, 그 동반 자살도 이 그로테스크한 유머를 이끌어내기 위해 면밀하게 계획된 일이었어야 한다. --- p.76, 「다카오와 미쓰코」중에서
‘손가락’과의 기묘한 사랑을 품은 나의 일상에서는 어떤 변화도 찾을 수 없다. ‘손가락’이 개입하는 것은 내 생활의 일부이지, 나의 일상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불안한 예감 때문에 나의 일상을 세부까지 속속들이 점검하며 생각했다.
--- p.101, 「사랑 같은」중에서
‘손가락’은 내 방의 벽장 속에 얌전히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방에서 내쫓을 방법을 생각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손가락’이 놀라지 않게 책상 대신 사용하고 있는 고타쓰 안에 두 다리를 들이민 채, 나 자신이 원숭이 같다고 생각했다.
--- p.121, 「사랑 같은」중에서
‘나’의 말, 연기다 관찰이다 해석이다 하는 말이, 탱자나무의 가시처럼 날카로운 돌기가 되어 내 몸에 꽂힌다. 나는 서 있다. ‘나’가 쥐어뜯은 수국 꽃잎이 비에 선명하게 젖어 있다. 구두 속이 질척질척하다. 비가 내리고 있다.
--- p.150, 「불만족」중에서
나는 걷기 시작한다, 내 다리는 마치 나와 ‘나’의 마음인 것처럼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띤 채 걷기 시작한다. ‘나’는 내 발소리에 고양이처럼 살며시 보조를 맞춘다.
비 내리는 아침, 물컹물컹하고 무거운 타르 같은 비가 내리는 아침, 나와 ‘나’는 다시 침묵한 채, 우산도 쓰지 않고, 노래도 흥얼거리지 않고, 또 걷기 시작한다.
--- p.151, 「불만족」중에서
고통스럽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왜일까? 기억 속의 그때와 똑같이, 아침 햇살이 안채의 양철 처마에 반사되어 공부방 안에 있는 나의 눈을 찌른다. 욕지기 같은 아침, 내 몸의 피부에 생긴 빨간 두드러기 같은 아침, 불 축제는 남자들의 축제, 불 축제는 이 고장 남자들이 몸에 붙은 액운을 떨어내기 위해 해마다 여는 축제다, 불 축제의 아침이다.
--- p.188, 「잠의 나날」중에서
축제 날이다. 그래서 나는 이 도시를 찾았다. 뭘 하려고? 나는 드러누운 채, 귓구멍 안에 혀를 들이밀고 간질이는 파도 소리를 느끼고 있었다. 잠이 오는 걸까? 두 눈을 살며시 감자 내 눈구멍에 하얗게 타오르는 어둠이 생겼다. 온몸을 빛에 드러낸 나는, 마치 해변으로 밀려 올라온 익사체 같았다. 분신자살을 기도한 남자처럼 내 몸에서 하얀 불길이 솟아오른다.
--- p.199, 「잠의 나날」중에서
옅은 회색 하늘이 내 몸에 오돌토돌한 돌기를 만든다. 질척질척한 황토색 길을 간다. 딱정벌레처럼 초록색으로 빛나는 대형 트럭이 지나갈 때마다, 마치 감기 걸린 고양이의 오한 같은 자잘한 진동이 생긴다.
도로 한가운데 팬 구덩이에 빗물이 고여, 빛이 보이지 않는 일그러진 하늘이 비치고 있다.
--- p.207, 「바다로」중에서
나는 걷고 있다. 내 안의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과거 나를 집어삼켰던 바다, 나를 압도하고, 목 졸라 죽였던 그 바다를 향해 나는 걷고 있다. 바다, 너는 삼월의 반짝반짝 빛났던 자신감과 긍지에 찬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피부를 짓찢고 깨물어 죽였다. 나는 걷기 시작한다. 내 안의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 p.215, 「바다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