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월 30일에 탄생한 제3제국은 히틀러의 호언장담에 따르면 천년을 이어갈 것이었으며 나치 용어로 흔히 ‘천년제국’이라 불렸다. 제3제국은 12년하고도 4개월을 버텼지만, 그 짧은 기간에 일찍이 지구상에서 벌어진 그 어떤 분란보다도 폭력적이고 충격적인 분란을 일으켰고, 독일 국민을 그들이 천년 넘게 알지 못했던 권력의 정점에까지 끌어올려 서로는 대서양부터 동으로 볼가 강까지, 북으로는 노스케이프부터 남으로 지중해까지 펼쳐진 유럽의 지배자로 만든 다음, 전쟁 막바지에는 파괴와 황폐의 심연으로 추락시켰다. 제3제국은 냉혹하게 전쟁을 유발한 뒤 전시에 피정복 국민들을 상대로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역사상 그 어떤 야만적 압제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생명과 정신을 계획적으로 도살했다. 제3제국을 세우고, 비범한 판단력으로 곧잘 기민하게 대응하며 무자비하게 통치하고, 아찔하게 높은 정점과 안타까운 결말로 이끈 남자는 비록 사악하기는 해도 의심할 바 없는 천재였다. 신비로운 섭리와 수 세기에 걸친 경험에 의해 주조된 독일 국민 안에서 그가 자신의 사악한 목적을 구현할 수 있는 자연적 도구를 발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악마적인 개성, 화강암처럼 단단한 의지, 기이한 본능, 냉정한 무자비함, 뛰어난 지능, 날아오르는 상상력, 그리고 (끝내 권력과 성공에 취해 무리수를 두기 전까지) 인간이나 상황을 판단하는 놀라운 능력을 겸비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없었다면, 필시 제3제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1장 제3제국의 탄생, 21-22쪽」중에서
나는 전체주의 국가에서 검열을 받고 거짓말을 하는 신문과 라디오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지를 몸소 체험했다. 대다수 독일인과 달리 나는 매일 외국 신문들, 특히 하루 늦게 도착하는 런던, 파리, 취리히의 신문들을 접할 수 있었고 또 주기적으로 BBC를 비롯한 외국 방송들을 들었음에도, 직업상 부득이하게 날마다 많은 시간을 들여 독일 신문을 샅샅이 훑고, 독일 라디오를 체크하고, 나치 관료와 상의하고, 당 집회를 보러 가야 했다. 나는 사실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고 정보원이 나치인 경우에는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음에도, 몇 년 동안 조작되고 왜곡된 정보를 꾸준히 접하다 보니 특정한 인상을 받게 되고 종종 그런 정보에 호도되는 경험을 하면서 깜짝 놀라고 때로 간담이 서늘해지곤 했다. 전체주의 국가에서 몇 년간이든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정권의 계획적이고 끊임없는 선전의 영향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439-440쪽」중에서
사실 히틀러는 나날의 세세한 통치 업무에 싫증을 냈고, 힌덴부르크 사후에 자기 입지를 공고히 다진 뒤로는 그것을 대부분 보좌관들에게 넘겼다. 괴링, 괴벨스, 힘러, 라이, 시라흐 같은 오랜 당 동지들에게는 저마다 권력의 제국을 ─ 아울러 대개 이권을 ─ 쌓아올릴 재량권이 주어졌다. 초기에 샤흐트에게는 정부 지출을 확대하기 위해 어떠한 술책으로든 자금을 조달할 재량권이 주어졌다. 이 사내들이 권력이나 이권을 놓고 충돌할 때면 늘 히틀러가 나섰다. 히틀러는 그런 다툼에 특별히 개의치 않았다. 실은 그런 다툼을 곧잘 조장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최고 중재자로서의 자기 위신을 높이고 이 사내들이 자신에 맞서 뭉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8장 제3제국의 삶: 1933~1937, 486쪽」중에서
겨우 4년 반 만에 이 미천한 출신의 남자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혼란스러운 데다 거의 파산한 상태였던 독일, 유럽의 강대국들 중 최약체였던 독일을 구세계 최강이라고 평가받는, 심지어 영국이나 프랑스까지 포함해 다른 모든 국가들을 벌벌 떨게 하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렸다. 이렇게 독일이 어지러울 정도로 상승하는 동안 베르사유의 승전국들은 그 어떤 단계에서도, 독일을 제지할 만한 힘이 있을 때조차 감히 제지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실제로 히틀러가 이룬 최고의 정복으로 기록된 뮌헨 협정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기를 쓰며 총통을 지지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특히 히틀러를 놀라게 한 것은 ─ 베크 장군이나 하셀 장군 같은 소규모 반대파들은 확실히 경악했다 ─ 영국 및 프랑스 정부를 좌우하는 사람들(총통은 뮌헨 협정 이후 사석에서 이들을 가리켜 경멸조로 “버러지들”이라고 불렀다) 중 그 누구도 나치 지도자의 연이은 공세 행동에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은 것이 장차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제12장 뮌헨에 이르는 길, 738쪽」중에서
실제로 이 과대망상증 독재자는 곧 역대 독일 제국들을 통틀어 어느 누구도 ─ 황제든 국왕이든 대통령이든 ─ 보유하지 못했던 권한을 합법화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더욱 키웠다. 1942년 4월 26일, 총통의 발의라면 무턱대고 찬성하는 제국의회는 법률 하나를 통과시켰다. 그 내용인즉 히틀러에게 모든 독일인의 생사를 좌우할 절대적 권한을 부여하고 그 권한을 방해하는 다른 모든 법률의 효력을 정지한다는 것이었다. 조문을 살펴보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지경의 법률이었다.
“독일 국민이 존속하느냐 절멸하느냐 하는 투쟁에 직면한 이번 전쟁에서 총통은 승리를 촉진하거나 쟁취하는 데 기여하는 모든 권리를 요구하고 보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국가의 지도자, 군대의 최고사령관, 정부의 수반과 최고행정관, 최고법관, 당의 수장의 자격으로 총통은 ─ 기존의 법적 규제에 구애받는 일 없이 ─ 필요할 경우 일반 병사와 장교, 관료나 법관의 지위 고하, 당직자의 지위 고하, 노동자와 고용주를 막론하고 모든 독일인에게 의무를 다하도록 가용한 모든 수단으로 강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이런 의무를 위반하는 사례가 발생할 경우, 총통은 신중하게 심사한 뒤, 소위 마땅히 보유하는 권리와 상관없이, 규정된 절차를 안내할 필요 없이, 위반자에게 응당한 처벌을 내리고 위반자를 그의 직책, 계급, 지위에서 배제할 자격을 지닌다.”
실로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의 지도자에 그치지 않고 ‘법’ 자체가 된 것이다. 심지어 중세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 야만적인 부족사회에서조차 명목상으로나 법률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이 정도로 전제적인 권한을 행사한 독일인은 일찍이 없었다.
---「제24장 전세 역전, 1492-1493쪽」중에서
4월 22일은 히틀러의 파멸의 길에서 마지막 전환점이 되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그날 이른 아침부터 오후 3시까지 전화기에 매달려 슈타이너의 반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여러 사령부에 확인하려 했다. 아무도 몰랐다. 수도에서 남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반격에 나서기로 되어 있었지만, 콜러 장군의 항공기들도, 지상군 지휘관들도 그 전장을 찾을 수가 없었다. 슈타이너의 부대는 고사하고 슈타이너도, 비록 존재하긴 했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분노 폭발은 오후 3시 벙커의 일일 군사회의에서 일어났다. 히틀러는 노기등등하게 슈타이너의 소식을 요구했다. 카이텔도, 요들도, 다른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장군들에게는 다른 소식이 있었다. 슈타이너를 지원하기 위해 베를린 북부의 병력을 철수시킨 바람에 그곳 전선이 너무 약해져서 소련군이 돌파했고 지금 전차들이 도시의 경계 안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었다. 최고사령관에게는 견딜 수 없는 소식이었다. 생존한 목격자들은 하나같이 히틀러가 자제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증언한다. 히틀러는 생애 최대로 분기탱천했다. 이제 끝장이라며 절규했다. 모두가 나를 저버렸다. 배반, 거짓말, 부패, 비굴함밖에 없다. 다 끝났다. 좋다, 나는 베를린에 남을 테다. 제3제국 수도의 방위를 직접 떠맡을 테다. 다른 사람들은 원한다면 떠나도 좋다. 이 장소에서 나는 최후를 맞을 테다.
---「제31장 신들의 황혼: 제3제국의 마지막 나날, 1901쪽」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