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는 새 출발이 없다. 시간은 분절된 것처럼 보여도 연속되어 있고 그 시간 속에 있던 나도 연속되는데, 어른들은 자꾸만 새 출발이란 단어로 사람을 속인다. 대학 가면 달라져, 취직하면 달라져, 결혼하면 달라져. 이 모든 퀘스트를 억지로 깨고 깨서 이 자리에 왔지만, 나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고 새로운 세상이랄 것도 없었는데. 새 출발이란 말에 난 또 숨을 참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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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무원 생활 4년 만에 ‘꼰대 감별사’가 되었다. 엠제트를 말하는 그의 입 모양에서 이미 꼰대 측량을 마쳤다. 이승협 팀장 정도면 꼰대 위의 꼰대 정도 위치. 하는 말마다 꼬박꼬박 말대꾸해서 입을 막아버리고 싶은데, 하지만 속으로만 중얼거릴 수밖에 없는 내 본심.
--- p.38
나 혼자 돌아가는 버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주룩 난다. 매일 5시면 이른 저녁을 먹으면서 소주 한 병을 전부 마시는 아빠가 정말 싫었는데, 아버지는 매일매일 내일의 힘까지 끌어다 썼던 거구나. 소모되는 고통을 잠시나마 잊으려고 술을 마셨던 거구나.
--- p.77
내가 살아오면서 만나온 내 친구들, 동기들, 동료들 전부가 그렇게 하고 싶은 거 다 해가면서 살잖아. 근데 엄마가 갑자기 편찮아지면서 알게 됐지. 평범 한 오리들 사이에서 난 미운 오리 새끼였구나. 엄마의 희생으로 억지로 이 틈에 껴서 꾸역꾸역 평범한 오리인 척 살아왔던 거구나.
--- p.93
공무원이 딱 빛 좋은 개살군데, 잠깐 빛 좋게 만들어 주는 게 이렇게 적재적소에 배치된 수당이란 말이야. 그런데 본질은 뭐야? 결국 개살구라는 거지. 나이 들수록 빈껍데기만 남아서 점점 조직에 목매는 거고, 승진에 목매는 거고, 평판, 정치질에 머리 싸매는 거지.
--- p.106
젊음이라는 특권? “젊음이라는 형벌”이란 말이 맞겠지. 젊음은 형벌이야. 견뎌내야 할 게 너무 많아.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짊어져야 할 게 너무 많아. 젊으니까 지치지도 말아야 하고, 젊으니까 항상 도전해야 하고, 젊으니까 조금 게을러서도 안 돼. 젊으니까 쉴 수도 없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대. 고생을 누가 사서까지 하냐.
--- p.145
노력은 너무 비싼 연료예요. 그걸 태워봤자 마음대로 굴러가지도 않는 게 인생이거든요. 그냥 가볍게 생각해요. 내 인생에 나 스스로 가지는 애정, 잘 해보고 싶은 의지. 그것만 있으면 인생이란 게 자기가 가진 운때에 따라서 어떻게든 흘러가는 거라고.
--- p.158
요즘 공직사회에서 엠지세대 이탈이 많은 것도 난 이해가 돼요. 물가는 오르고, 부동산값도 오르고, 결 혼도 해야 되고, 애도 낳아야 되고. 나 빼고 모든 게 인플레 맞는데, 내 월급은 적어지고 나도 작아지고. 공무원 조직은 가만히 있는데 세상은 저 앞으로 멀어지고. 안정적인 조직에서 정착하는 게 오히려 미래의 불안정을 초래하겠다. 이렇게들 생각하는 건데.
--- p.161
근데 방황을 할래도요, 애매한 방황을 해버리면 인생이 꼬여요. 주무관님이 방황을 할 거면 온몸을 던져서 하라고요, 확실하게. 진짜 정신 좀 차려요. 20대의 애매한 방황은 30대가 돼서 복수를 하고, 30대의 애매한 방황은 40대에 더 큰 복수를 해요. 타격감은 나이가 들수록 배가 되고 회복력은 반감돼요.
--- p.163
맞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 정답은 안에도 밖에도 없다. 그렇다면 난 어디로 가야 하지?
--- p.178
결혼이란 건 생각보다 잔인한 저울이었다. 남과 여가 결혼이라는 저울에 올라가 서로 지나온 인생의 무게를 달았다. 학벌이 어떻고, 직업이 어떻고, 사소하게는 키나 몸무게 그리고 모아온 재산들까지, 모든 걸 빠짐없이 끌어안고 저울에 올라갔다.
--- p.180
시원한 바람, 파란 하늘, 봄 냄새, 여름 냄새, 가을 냄새. 아, 너무 좋아. 내가 가는 길이 너무 행복해서 소라를 잊고 있다가 “너도 행복하지?” 물으며 뒤를 돌아봤는데 사실은 나 혼자 굴렸던 내 자전거. 소라는 언젠가부터 있지만 없었던 거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보조 없이도 잘 달릴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되었다.
--- p.195
그녀는 그냥, 그냥 내가 싫었다고 고백한다. 내가 어떤 노력을 해봤자 절대 깰 수 없는 두 글자.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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