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요양보호사 삼 년. 그곳에서 나는 고되고 고된 초보 요양보호사 시절을 보내고 지금은 준고참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보호자로서 경험했던 요양원, 요양보호사로서 근무하는 요양원. 그곳에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면서 기적 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어르신들, 그 어르신들의 기적을 조석으로 마주하면서 함께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애쓰는, 그럼에도 아직 사회적 인지도가 낮은 요양보호사.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든 우리 사회에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수인력으로서 나는 그곳에 있다.
--- p.8~9
나는 어르신들 곁에서 요양보호사로 꼬박 삼 년을 함께했다. 그렇게 함께한 요양보호사의 눈으로 어르신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싶었다. 그분들이 보내는 하루하루를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그 가운데서 삶의 의미와 존엄을 찾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관련 서적을 읽었고, 짬짬이 어르신들의 하루하루를 기록했다. 더불어 되물었다. 어르신들의 삶의 마지막 장을 어떻게 돌보는 것이 옳은지, 또 그러한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를. 하는 일의 가치에 비하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 땅의 요양보호사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처우를 받고 있는지도 고스란히 보여주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서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자녀들, 어느새 부모의 보호자가 된 그들이 알아둬야 할 일들을 귀띔해주고 싶었다.
--- p.10
이제는 알 것도 같아요. 그대들이 밤을 걷는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을. 밤이기 때문에 걸어다니면 안 된다는 것은 우리가 만든 일방적 기준에 불과해요. 그대들의 뇌 속에서 걷고 싶다는 욕망이 튀어나오면 걸어야겠지요. -
-- p.53
이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딸이 와서 엄마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울어도, 정작 본인은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 흘리는 이 여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불행한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돈이 아프게 살다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불행한 일이 아닌 것처럼.
--- p.96
우리는 치매 걸린 부모가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당하고 바라봐야 하는 자식들이 불행한 것임을, 아니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는 것임을 알았으면 좋겠다.
--- p.97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우리 업무의 하나이다. 우린 늘 ‘노인인권’과 ‘노인 학대’ 관련 교육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이 작동하지 않을 때가 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 어르신을 보살피다가 더 이상 보살필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야 눈물을 머금고 요양원으로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어르신에게 가져야 할 마땅한 감정은 ‘인지상정’과 ‘역지사지’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과 감정이 공존하는 동물 아니던가?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우리의 업무라지만, 나는 아직 멀었나 보다.
--- p.175
요양원의 세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밖에서 보는 요양원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 환자들이 주는 대로 먹고, 마시고, 잠자는 그런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다. 치매에 걸렸어도 인간은 인간이니 그 원초적 감정마저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다.
--- p.183~184
나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지금이 참으로 행복하다. 내가 죽음을 맞는 그 순간 나에게 가장 잘한 선택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들의 눈에는 하찮게 보이는 이 일이, 나에겐 참으로 소중한 일이었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어르신을 돌보았던 일은 참으로 잘한 선택이었다고.
--- p.192
우리는 이제 ‘좋은 돌봄을 받는 몸’이 되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한다. 물론 잠을 자다가 조용히 가는 사람은 열외이겠으나,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헬스장에 가서 근력 운동을 하고, 뱃살을 줄이고, 몸에 좋은 비타민을 먹고, 삼시 세끼 균형 잡힌 식사를 하고…, 뭐 그런 거 말고 이런 거 말이다. 어차피 가지고 갈 재산 아닌데 기부도 좀 하고, 땡볕에 폐지를 줍는 허리 굽은 노인네들에게 음료수 한 잔 드리는 것,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사는 것, 살아 있는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것, 지구 전체 환경을 생각하며 분리수거라도 잘하는 것, 노점상에게 사과 한 바구니 사면서 덤 달라고 떼쓰지 않는 것, 환경미화원은 대학 나온 젊은이가 하는 일이 아니라는 편견을 버리며 사는 것, 정화조 청소를 못 하게 되면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며 그들의 삶을 존중하며 사는 것, 뭐 이런 것들은 어떤가?
--- p.200
특히 죽음과의 교전이 한창인 요양원에서, 지극히 조용하지만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어르신들 곁을 지키는 우리는 그분들의 든든한 지원부대원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죽음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경건하고 숙연하게 맞이하도록 돕는 일, 그래서 삶의 마지막 날들이 아쉽지 않도록 거드는 일. 요양보호사들은 우리의 임무를 확인할 수 있을 때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감히 말하겠다.
--- p.210
어느 누구도 치매로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다. 시설이 엄청 훌륭하고, 유기농 식재료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고, 식사 후 매일 일광욕을 시켜주고, 근육이 굳지 않도록 적당한 운동을 시켜주는 요양원이 늘어난다고 치자. 그 역시 어르신의 삶을 구속하고, 규제하고, 속박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우리 시설 좋은 요양원에서 삶을 마감하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치매에 걸렸기 때문에 집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을 요양원이라는 시설에서 대신하고 있지만, 개개인의 욕구를 다 충족하는 시스템을 만들 수는 없다. 다만, 내가 지금까지 말했던 이야기들―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 인지상정과 역지사지의 마음―처럼 생각을 바꾸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 p.214
나도 가끔 꿈을 꾼다. 이런 요양원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꿈. 어르신들이 식사를 한 후에 한 시간씩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서 밖을 바라볼 수 있는 곳, 걸어다닐 수 있는 어르신들이 실내 텃밭에 채소를 심어놓고 가꾸거나 물을 줄 수 있는 곳, 요양보호사와 어르신들이 한 방에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의 늙어감에 대해 교감하는 시간이 존재하는 곳, 일률적인 식사 메뉴가 아니라 의사의 권유와 자신의 식성에 적합한 식사를 제공하는 곳, 널찍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요양보호사와 가요무대를 함께 시청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는 곳,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뜨개질로 소일거리를 삼을 수 있는 곳, 서서히 굳어가는 근육을 매일 풀어줄 수 있는 물리치료시설이 완벽한 곳, 그리고 보호자가 면회 와서 자신의 부모님과 하룻밤을 잘 수 있는 게스트룸이 마련된 그런 요양원.
--- p.224~225
훌륭한 보호자는 어르신들을 돌보는 내 모습을 비춰보게 만드는 좋은 거울이다.
--- p.236
우리 요양보호사들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를 낮추어 보고, 우리의 돌봄 서비스를 당연시하는 보호자, 참으로 진상이다. 사람 사는 세상, 차 떼고 포 떼듯 그 알량한 계급장 떼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닌데, 왜 우린 사회적 약자에게 군림하는 강한 자가 되는가? 아니 강한 자처럼 행동하는가?
--- p.242
어떤 종류든 치매에 걸리면 반드시 언어와 행동에 이상 증세가 나타난다. 이때 평소와 다른 부모님을 나의 기준으로 보지 말고, 부모님의 관점에서 보도록 노력해야 한다. 일테면 긴 시간 텔레비전을 시청하는 것보다는 바둑알을 섞어놓고, 흰 돌과 검은 돌을 구분하는 놀이를 함께해보면 좋다. 손끝을 자주 움직이며 돌을 구분하는 과정에서 두뇌를 좀 더 활용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평소에 하시던 습관을 그대로 하게 두되, 위험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세밀하게 관찰하는 것도 좋다. 물론 주간보호센터에서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집에 와서까지 억지로 손끝을 움직이는 놀이를 이어서 하지 않아도 된다.
--- p.245
집에서 하루 종일 치매 걸린 부모님과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일이 버거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 부모님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후회로 남지 않도록 하는 일. 그것만 생각하자. 그러면 하루가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 p.248
무엇보다 집에서 치매 부모님을 돌볼 때 간과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대화의 가능성’이다. 치매에 걸리면 일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화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대화는 양방향성이 맞다. 하지만 서로 동문서답을 하더라도 그것 역시 대화에 속한다. 서서히 머릿속에서 잊혀가는 사물의 이름들을 자주 물어주는 것, 부모님의 장기 기억을 계속 환기시켜주는 것, 그래서 뇌와 혀와 입술과 목구멍의 연결이 막히는 일을 더디게 해주는 것.
--- p.250~251
내 경험상 요양원에서 자식이나 배우자를 잊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잔인한 일일 수도 있다. 면회를 갔는데 부모님이 나를 못 알아본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부모님의 까칠해진 손을 잡아 드리고, 수척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안고, 등을 토닥여 드리면서 내가 가진 마음속 깊은 사랑을 촉감으로 전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 p.254
자주 찾아뵙지는 못하더라도, 요양원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안다면 덜 힘들지 모른다. 어디 사랑이라는 불변의 진리가 떨어져 산다고 해서 변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요양원에 계신 어르신은 ‘집’과 ‘자식’을 무의식 속에서도 놓지 않는다는 것을 믿어주길 바란다.
--- p.262
한번쯤 말을 걸겠지. 언제쯤일지는 모르지만, ‘노환과 질병, 통증과 죽음’이라는 손님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들이 찾아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돌봄을 받는 이들’에게나 ‘돌봄을 하는 이들’에게 아주 호의적이어야 하며, 누구나 피해갈 수 없기 때문에 말을 걸어오는 손님과 적절히 동행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