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진리를 위해 힘써 싸우라”라는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의 군사들이다. 교회를 대적하는 원수들이 우리가 지키고 보존하며, 전해야 할 진리를 공격하기 위해 몰려 오고 있다. 더 위험한 것은 “가만히 들어온 자들”이 은밀하게 활동하는데 교회가 그것을 잘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의 오류를 밝히 드러내고 자신과 교회를 지켜내야 한다. 유다서는 원수들의 정체성과 활동을 폭로하면서 우리가 그들에게 속지 않아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하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더 견고하게 서도록 가르친다.
---「1강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 중」중에서
오늘날 교회에서 목자로서 목사의 이미지는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현대 교회는 지도력에 대한 모델을 기업경영에서 차용한다. 목사를 “목자”로 생각하기보다는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나 거대한 축산 농장의 “농장주인”과 같이 여긴다. 그런 대형교회들로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그런 교회만이 효율을 극대화하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강 가만히 들어온 자들을 분별하라」중에서
참된 교회에도 꿈꾸는 자들이 들어오기도 하고, 내부에서 자라기도 한다. 그들은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강설을 비판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사단이 간교한(지혜로운) 것처럼, 사단의 사자들도 의의 일꾼처럼 가장한다. 그들은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추종자들을 확보하면 무소불위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한다. 그래서 분쟁이 일어나고 교회가 큰 혼란에 빠진다. 이런 자들은 추종자들을 규합하여 당(黨)을 짓고 교회(교단)의 질서와 말씀의 권위를 업신여긴다(고전 11:18~19). 이런저런 명분을 만들어서 하나님 자리에 자기를 세우려고 한다.
---「3강 꿈꾸는 이 사람들」중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율법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는 자들은 값없는 은혜의 가면을 쓴 악의 옹호자다. 교리적인 무율법주의자와 성경 해석상의 무율법주의자들은 복음과 율법을 분리하고 은혜를 색욕 거리로 바꾼다. 그들은 교만하여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4강 하지만 심지어(But even)」중에서
오늘날도 가인과 같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지만, 결코 믿음에 자신을 드리지 않는다(히 4:1~2). 온갖 거짓된 논리와 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순종하지 않을 명분을 대면서 자기를 합리화한다. 그런 사람들은 참된 신자들의 믿음과 순종을 비웃고 조롱하면서 핍박하기까지 한다(마 24:49). 그들이 순종하고 열심을 내는 것은 자기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이익과 배치되면 언제든지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제자의 길과 교회를 떠난다.
---「5강 종교인인가? 신앙인인가?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중에서
사람의 말과 행위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낸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대항한 말은 부주의하고 무식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말은 그들의 본성을 드러냈다. 교회를 섬기는 사역자들의 말도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자인지, 사단에 속한 자인지를 드러낸다. 우리는 그들의 말과 행동으로 그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6강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중에서
우리는 “이미”와 “아직” 사이의 긴장 속에서 시대를 분별하면서 주어진 선교적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 종말의 시대는 교회의 선교를 위해 주어진 시간이다. 우리가 선교의 사명을 감당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등한시한다면, 역사의 목적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이다. 또한, 이 시대는 배교가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시대이다. 교회 안에도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을 조롱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동시에 교회는 마지막 때에 구속받은 공동체로 존재하지만, 여전히 불완전한 성도들의 모임이다. 우리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면서 여전히 불완전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의 행보도 늘 완전할 수는 없다. 복음 전도와 교육, 목회적 돌봄과 훈련도 이런 긴장 관계를 고려해야 한다.
---「7강 시대의 표적」중에서
힘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의 힘은 폭력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방법으로 폭력을 치유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일반은총 가운데 폭력을 제한하기 위해서 세속정부를 주셨지만, 일반은총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없다. 오직 복음 설교만이 폭력(힘)에 의존하는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다. 복음 설교만이 인간의 근본 문제(죄된 실상)를 보여줄 수 있고, 참된 치유를 제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 있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세워진 교회만이 힘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무참히 짓밟히고 희생당한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할 수 있다. 거룩한 믿음 위에 세워진 성도들만이 복음을 살아내는 증인으로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다. “대저 하나님께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8강 어떻게 싸울 것인가?(1)」중에서
우리의 긍휼과 섬김은 앞뒤를 분간하지 않는 맹목적인 구제나 구조가 아니다. 예수님이 섬기는 자로서 가장 지혜롭게 사람들을 도왔던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것은 상대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에게 가장 적절한 복음의 처방을 제시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에 대해 잘못된 진단과 처방을 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없는 의원이니라”(욥 13:4).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상담해주고 조언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상대방은 그분의 조언은 자기 상황과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서 긍휼함이나 사랑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우리 자신을 돌아보자. 우리도 누군가를 열정적으로 돕고자 했으나 진단과 처방이 잘못되었다면, 긍휼한 마음이 없이 조언한다면, 거짓말하는 자요, 쓸모없는 의원이라는 책망을 듣게 될 것이다.
---「9강 어떻게 싸울 것인가?(2)」중에서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각자가 맡은 소임이 있고, 자신만의 영적인 위치와 장소를 가지고 있다. 이런 영적인 위치와 장소는 다른 사람을 주장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겸손히 섬기도록 주어졌다. 우리는 말씀과 성령 안에서 서로 의존되어 있다. 각자에게 주어진 은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고 몸 된 교회가 받은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 사용될 때만 의미가 있다. 복음은 우리가 하나 되어 서로 사랑하면서 지켜주도록 이끈다.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가 힘이 있다. 그런 공동체는 어떤 도전도 막아낼 수 있고 어떤 견고한 진도 파할 수 있다. 하나가 된 공동체가 복음으로 세상을 섬기며 이웃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 시편 149편이 가르치는 것처럼, 이것이 우리의 존영이며 영광이자 특권이다.
---「10강 어떻게 싸울 것인가?(3)」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