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 예수’라는 개념은 이 땅에 몸담고 살았던 예수, 다양한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하고, 먹고, 그들 삶의 문제에 개입하고 연대하며 살았던 예수의 삶과 그 가르침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조명하고 되새기고자 하는 ‘나의 시도와 해석’이다. 2천여 년 동안 제도화된 종교인 기독교의 울타리 안에서 ‘길들여진 예수(domesticated Jesus)’의 장막을 걷어내고, 그 어떤 경계도 긋지 않고 자유롭게 사람들과 ‘함께의 삶’을 살았던 예수, 무조건적 사랑과 용서와 환대를 가르쳐준 예수를 새롭게 만나고자 하는 것이 내가 예수를 ‘철학자’라고 호명하게 된 의도다.
--- p.39
기독교인들 특히 개신교인 중에는 마틴 루터의 ‘두 왕국론(two kingdoms doctrine)’을 믿는 이가 많다. 개신교인뿐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고 자신의 종교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막연히 ‘이 세상-저 세상’ 또는 ‘신의 나라-세속의 나라’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지금 내가 몸담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세상이며, 예수 믿고 구원받아 가는 ‘저 세상’ 천당, 그 초자연적 세계가 진짜 세상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떤가.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세밀하게 보면 예수의 가르침 핵심은 언제나 ‘지금 여기’라는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관한 것이다. 즉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넘어서 초자연적인 세계, 저 우주 어딘가에 물리적으로 자리 잡고 있는 ‘신의 나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환대, 사랑, 용서, 연민, 책임 등의 가르침은 언제나 ‘지금 여기의 세계’에 개입하고 관여했다.
--- p.53
예수만 믿으면 천국에 가서 영생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예수는 우리의 구원자로서 열심히 기도하고 교회에 충성하면 갖가지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기독교의 메시지는 얼마나 매력적으로 들리는가. 그렇게 죽음에의 두려움을 넘어서 구원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메시지를 교회에서 늘 들으면서 예수를 따르기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사람들은 굳건히 믿게 된다. 그런데 예수가 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 예수가 제시하는 “삶의 지혜와 길”이 정작 자신의 일상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사유조차 하지 않는다. ‘선량한 기독교인’들이 아렌트의 표현인 “비판적 사유의 부재로서의 악”에 가담하게 되는 배경이다.
--- p.58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했다. 니체의 이 선언을 마주할 때 다수의 사람이 “죽었다(dead)” 부분을 결정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니체를 기독교의 ‘적’으로 쉽사리 간주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근원적으로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다. 어떤 질문을 해야 하는가.
[니체가 ‘죽었다’고 선언하는 그 신은, 과연 어떠한 ‘신’인가.]
--- p.83
기독교는 흔히 “사랑의 종교”라고 불린다. 기독교 중심에 있는 예수 가르침의 핵심을 하나로 한다면 ‘사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서의 사랑 이해를 급진적으로 확장하면서, ‘나 사랑-이웃 사랑’만이 아니라 ‘원수 사랑’까지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사랑이 ‘신 사랑’과 연결된다고 가르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예수의 ‘이웃’ 범주는 유대교에서와 같이 종족적 동질성을 공유하는 ‘유대인’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예수가 이 사랑의 범주에 소위 ‘원수’까지 포함시켰다는 것, 그리고 예수의 다양한 가르침들을 보면, 그 ‘이웃’에는 ‘모든 인간’이 포함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든, 신을 알지 못합니다”(요한1서 4:8)라는 요한의 말은 예수의 사랑 철학의 깊이와 넓이를 잘 담아내고 있다.
--- p.116
예수가 “당신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의미를 나의 일상생활에서 실천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욱 복합적이고 치열한 정치적 행위의 의미를 지니곤 한다. 예수의 사랑 계명이 나에게 익숙하고 친근한 가족 또는 같은 교회, 같은 학교 출신, 같은 직업 또는 같은 기독교인을 향해서만 잘 대하는 것이라면 예수의 사랑의 철학은 결코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예수가 예리하게 지적하듯이 그러한 사랑은 누구나가 다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사랑 철학은 내가 잘 아는 가족이나 친구만이 그 적용 대상이 아니다. 또는 나의 사적인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무수한 ‘너’들과 연결되는 삶을 살아간다. 개인적 정황과 사회정치적 정황은 분리 불가하다. 예수의 사랑 메시지를 “새로운 계명”의 의미로 만드는 것은, 그 사랑의 적용 지평을 복합화하고 확대하는 것이 요청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수의 사랑 철학을 적용하는 범주를 지속적으로 확장하는 의도적인 시도가 필요한 것이다.
--- p.139
어거스틴과 카푸토의 ‘신 사랑’에 관한 질문을 ‘예수 사랑’으로 돌려보자.
1. 내가 나의 예수를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2. 내가 나의 예수를 사랑할 때, 나는 ‘어떻게’ 사랑하는가.
이 두 질문은 예수의 ‘사랑의 철학’ 이해를 확장하는 데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 p.145
무조건적 용서가 가능한 것인가. 그것이 쉽게 가능하다면 굳이 ‘용서’라는 말을 할 필요조차 없다. (중략) 예수도 사랑에 대하여 그러한 말은 이미 했다. 누구나 다 하는 사랑은 그 의미가 없다는 것, “만약 당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을 사랑한다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누가 6:32)라고 한 맥락과 유사하다. 즉 쉽게 ‘가능한 사랑’이 아니라, 거의 ‘불가능한 사랑’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사랑의 의미라고 하는 것이다. 용서도 마찬가지다. 용서할 만한 것을 용서하는 것은 이미 용서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없다.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소중한 개념을 사용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진정한 용서란 데리다의 말처럼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
--- p.186
내가 미등록 이주민을 한 인간으로 대하며 환대를 베풀었다고 하자. 그 미등록 이주민을 내 집에 머물게 하고, 내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일하게 하고 급여를 준다고 하자. 개별성의 존재로서 나는 그 사람의 국적이 어떻든, 법적 지위가 어떻든 그를 한 ‘동료-인간’으로 대하면서 환대를 베풀었다. 그런데 이런 나의 환대가 국가가 제정한 법에 어긋난다고 할 때, ‘개별성의 존재’로서 나의 환대는 ‘일반성의 존재’로서 내가 속한 국가의 환대와 대치점에 놓인다. 개인적 환대와 국가적 환대는 우리의 일상 세계에서 종종 긴장하고 대치한다. 내가 베푸는 ‘개인적 환대’가 법이 정한 ‘국가적 환대’와 다를 때, 국가적 환대는 그 법적 권력으로 나 개인의 환대를 ‘범죄 행위’로 규정할 수 있다.
--- p.201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성서에 ‘써 있는 것만’이 아니라 ‘쓰여 있지 않은 것’까지 읽어야 하는 ‘상상의 읽기’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서 그 ‘간음 현장’에는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도 있었다(요한 8:3). 그런데 소위 ‘간음 현장’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 앞에 끌고 온 사람은 왜 여성뿐인가. 그 현장에서 이 여성과 함께 있었던 남성은 왜 끌려오지 않았을까. 또한 자기와 함께 있던 여성이 끌려갈 때, 그 남성은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취했을까. 이러한 질문들은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의 사회정치적 또는 문화적 정황에 대한 이해를 하게 만들기에 중요하다.
--- p.307
예수가 활동했던 시대적 정황을 21세기 정황으로 옮겨보자면, 예수가 ‘주인공’으로 설정한 사마리아인은 다음과 같은 사람일 수 있다. ‘사마리아인’은 기독교인이 아닌 이슬람교도, 불교도, 또는 무종교인일 수 있다. 그 ‘사마리아인’은 이성애자가 아닌 성소수자일 수도 있다. 그 사마리아인은 박사, 교수와 같은 고학력자가 아니라 저학력자일 수 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존경받는 사람’, 또는 사회·정치·종교적 권위와 권력을 가진 중심부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의 예화 주인공은 통상적인 ‘중심부적 존재’가 아니라 ‘주변부적 존재’다. 관습을 뒤집는 예수의 이러한 예화는 “규범 전복하기(subverting the norm)”의 전형이다. 예수는 여러 가지 예화와 구체적인 행동들을 통해서, 또 자신의 ‘규범 전복하기’의 장치를 통해서 ‘급진적 포용의 원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 p.250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그 당시 지배적이었던 사회종교적 관습에 갇혀서 여성을 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존엄성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가 ‘페미니스트’라고 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며 중요하다고 나는 본다. 만약 예수가 여성과 남성의 평등성과 존엄성을 인지하고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라면, 여성들을 당시 사회적 인식처럼 남성보다 열등한 제2등 인간이라고 생각한다면, 21세기에 여성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를 의미는 없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를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사람’이라고 규정할 때, 예수는 페미니스트일 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
--- p.278
· 성서에 나오는 구절이나 사건들이 ‘지금의 나’에게 어떠한 의미를 주는가.
· 성서를 내가 살고 있는 정황, 그리고 사회와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는가.
예를 들어 창세기에 보면 신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했다고 한다. 그 창조 이야기가 만약 역사적 ‘사실의 기록’이라면, 인간 창조 당시 아담과 하와는 ‘0살’이었을까. 그 둘의 눈 색깔, 머리카락 색깔, 또는 피부색은 무엇이었을까. 백색인가, 흑색인가, 황색인가, 또는 갈색인가. 갓난아이였다면 젖은 누가 먹였을까. 성서가 사실의 기록이라면 이 질문에 답이 있어야 한다. 또 왜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인간을 창조한 이야기가 각기 다르다는 ‘사실’에 대하여도 정답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누구도 이 상충하는 인간 창조 사건에 대해 ‘정확한 사실’을 보여 줄 수 없다. 성서는 저자들이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을 담은 책이 아니다.
--- p.289
“내가 나의 신을 사랑할 때, 나는 어떻게(how) 사랑하는가.” 이러한 유사 질문을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자.
1. 내가 나의 예수를 사랑할 때, 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
2. 예수라면 성소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3.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나는 성소수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
4. 예수라면 세계 곳곳의 난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5.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나는 난민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6.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나는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7.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나는 한국 사회에서 이동권의 자유를 보장해달라고 투쟁하고 있는 장애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8. 내가 예수를 사랑한다면, 기아 선상에서 죽어가고 있는 빈곤 아동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9. 예수라면 여성에게 목사 안수와 사제 서품을 허용하지 않는 교회에게 뭐라고 할 것인가.
10. 내가 나의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할 때,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 p.3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