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골드문트,” 소년이 말했다. “새로 온 학생입니다.”
나르치스는 미소도 없이 짤막하게 인사하고 그에게 뒷줄의 자리를 가리켜 보이고는 곧바로 다시 수업을 이어갔다.
골드문트는 자리에 앉았다. 자기보다 겨우 몇 살 위로 보이는 젊은 교사를 보고 놀랐다.
--- p.19
골드문트의 사랑을 일깨운 또다른 사람은 그보다 날카로운 눈길로 더 많은 것을 짐작했지만 뒤로 물러나 있었다. 나르치스는 정말 사랑스러운 황금새 한 마리가 자기에게 날아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고귀함 때문에 고독한 그는 골드문트를 보자마자, 모든 면에서 자기와 반대되는 것 같지만 실은 비슷한 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나르치스가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에 깡마른 모습인 반면, 골드문트에게서는 광채와 생기가 넘쳤다. 나르치스가 사색가로서 무엇이든 분석한다면, 골드문트는 꿈꾸는 자, 어린아이의 영혼 같았다. 하지만 이런 차이점들은 하나의 공통점 위에 놓여 있었다. 즉 둘 모두 고귀한 인간이었고, 눈에 띄는 재능과 표지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었으며, 운명으로부터 특별한 경고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 pp.23~24
그런데 이제 또다른 것이 추가되었다. 새로운 놀라움, 새로운 경험이. 나르치스가 자신을 받아들였다, 나르치스가 자신을 사랑한다, 나르치스가 자신을 보살폈다 - 저 섬세하고 고귀한 사람, 약간 냉소적으로 보이는 얇은 입술의 영리한 그가 말이다. 그런데 자신은 그의 앞에서 자제력을 잃고 부끄러워하고 말을 더듬다가 기어이 울음까지 터뜨리고 말았다!
--- pp.34~35
다니엘 원장의 귀에도 두 사람 이야기가 종종 들어왔다. 온갖 소문, 고발, 비방 따위였다. 사십 년도 넘는 수도원생활에서 그는 수많은 젊은이의 우정을 목격했다. 그것은 수도원 풍경에 속하는 아름다운 선물로 때로는 유쾌한 일이었지만 때로는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그는 개입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 유심히 지켜보기만 했다. 다른 이를 배제한 그토록 격렬한 우정은 흔치 않았다. 확실히 위험한 요소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원장은 단 한 순간도 그 순수함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그냥 내버려두었다.
--- p.45
나르치스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골드문트일 때는 너를 진지하게 여겨. 하지만 넌 항상 골드문트인 건 아니야. 나는 네가 온전하게 골드문트였으면 해. 넌 학자가 아니야, 수도사도 아니고 - 하찮은 잡목으로도 학자나 수도사를 만들 수 있어. 너는 나에 비해 너의 학문 수준이 떨어지고, 논리가 빈약하고, 경건함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아니, 그렇지 않아. 너에게 부족한 것은 너 자신이야.”
--- p.56
관솔불을 비추면서 크나큰 호기심으로 진통에 시달리는 여인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데 예상치 못한 뭔가가 나타났다. 소리치는 여자의 일그러진 얼굴에 나타난 선線들은 다른 여자들이 사랑에 도취한 순간 보이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의 표정이 크나큰 쾌락의 표정보다 좀더 격렬하고 좀더 일그러지긴 했다 -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다르지 않았다. 똑같은 일그러짐, 똑같은 타오름과 소멸이 있었다. 왜 그런지는 몰라도 고통과 쾌락이 자매처럼 비슷할 수 있다는 이런 깨달음에 그는 깜짝 놀랐다.
--- p.160
골드문트는 재능이 뛰어난데도 그것을 펼쳐 보일 충분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는 불운한 예술가들에 속하지는 않았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크고 깊이 느낄 수 있고 또한 그 고결하고 숭고한 이미지들을 영혼에 품을 재능은 주어졌지만, 이 이미지들에서 스스로 다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의 기쁨이 되도록 그것을 밖으로 끌어내 널리 알릴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사람도 많았다.
--- p.196
골드문트가 지닌 가장 깊은 모순들의 화해 가능성, 또는 그의 본성의 분열을 나타내는, 거듭 새로워지는 뛰어난 비유의 가능성은 예술과 예술가 본질 안에 들어 있었다. 하지만 예술은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었다. 결코 공짜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매우 많은 비용과 희생을 요구했다.
--- p.209
그는 언제나 자신을 미워하고 경멸하고 두려워하는, 재산을 소유한 정착민의 원수이자 적이다. 정착민은 이 모든 것을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의 순간성, 모든 생명이 끊임없이 시들어간다는 것, 우리 주변의 세계를 가득 채운 가차 없고 차가운 죽음 따위를 말이다.
--- p.236
“그럴지도 모르지.” 나르치스가 말했다. “그런 점에서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네. 하지만 선량한 의지를 가진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일은 이거야. 우리의 작품이 마지막에는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는 것, 우리는 언제나 다시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 언제나 다시 희생을 바쳐야 한다는 것 말이야.”
--- p.354
나르치스가 그에게 말했다. “자네가 돌아와서 정말 기뻐. 자네가 없는 동안 몹시 힘들었거든, 매일 자네 생각을 했네, 자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웠어.”
골드문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빈자리가 그리 크지도 않았을 텐데.”
나르치스는 가슴이 고통과 사랑으로 타올라 그에게 몸을 숙이고 그 오랜 우정의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행동을 했다. 골드문트의 머리카락과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댄 것이다.
--- pp.371~372
“그야 내가 멍청하니까 그렇겠지요. 나는 정말 궁금해. 내세는 아니야, 나르치스, 내세 같은 건 거의 생각하지 않아. 솔직히 말해도 된다면 그런 건 믿지 않아요. 내세는 없어. 말라버린 나무는 영원히 죽은 거야, 얼어죽은 새도 다시는 살아오지 않고, 인간도 한 번 죽으면 돌아오지 않아. 누군가 떠나면 남들이 잠시 그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리 오랫동안은 아닐 거야. 아니, 죽음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 것은, 내가 어머니에게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나의 믿음 또는 꿈 때문이야. 나는 죽음이 거대한 행복이기를, 첫사랑의 충족만큼이나 거대한 행복이기를 바라거든. 나를 다시 거두어들여 존재하지 않음으로, 무구함으로 되돌리는 것은 큰 낫을 든 죽음이 아니라 내 어머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어.”
--- p.3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