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원도는 어른이다. 먹을거리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어른. 배고프면 직접 밥을 차려 먹고 설거지까지 해야 하는 어른. 설거지하다가 그릇을 깨면, 깨진 그것을 직접 치워야 하는 어른. 가끔은 자기 아닌 타인에게 너 밥은 먹었니 물어보는 어른.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도 있는 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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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동안, 잊을 만하면 튀어나와 원도를 궁지로 몰아넣던 질문. 때론 가소롭고, 때론 무섭고, 때론 고통스럽던 질문. 글자나 소리로 이루어진 대답이 아닌, 원도 자체를 요구하던 그것.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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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있었고, 딸이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모욕과 경멸, 쉽게 잊고 만 실패와 감동, 주체할 수 없는 원망과 분노, 비열한 순간과 절망의 날들. 그리고 희망. 꿈. 하고 싶고 갖고 싶고 이루고 싶었던 것들. 하지만 그때의 경멸이 정말 경멸이었는지, 감동이 정말 감동이었는지, 절망이, 희망이 정말 그것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아내가 무엇인지, 동료가 뭐고 선생이 무언지,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결국 다 한통속이고, 진흙처럼 엉긴 덩어리일 뿐이다. 그 안에서 각자의 자리를 바꾸더라도 크게 다를 바 없는, 결국 나를 배신하거나 기만하거나 파멸시키기 위해, 아니 꼭 그것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는 자들의 덩어리라는, 그런 느낌뿐이다. 괴롭다. 그 무엇도 명확히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 존재할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이. 내 인생이 뒤틀려버린 단 한 순간이. 알아야 한다. 그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pp.21-22
살면서 단 한 번도 나를 직접 본 적이 없는 나는 죽어서 나를 볼 수 있을까. 내가 보는 나는 언제나 거울 속의 나였다. 혹은 유리 속의 나. 좌우가 뒤바뀐 나. 그것은 나지만 내가 아니기도 했다. 비친 나에 불과했다. 그것 아닌 나를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었다. 나를 보고 싶다. 남처럼 보고 싶다.
---p.27
실패의 기억.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실패는 많았다. 성공보다 많았다. 실패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좌절이나 절망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것. 따지고 보면 모든 것이 실패다. 사랑했으나 헤어졌고 응시했으나 떨어졌고 돈을 가졌으나 파산했고 결혼했으나 이혼했고, 이혼하지 않았더라도 그것은 실패고, 태어났으나 죽을 것이다. 아니, 태어났으니 죽을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은 기억에 없다. 죽는 순간 역시 기억에 없을 것이다. 시작과 끝이 텅 빈 구멍이다. 그 구멍으로 온 생이 콸콸 쏟아져 사라질 것이다.
---p.30
때가 되면 차고 넘치는 것. 의미를 잃으면 쓰레기에 불과한 것. 동그라미 하나에 인생이, 인상이, 체면이, 대접이 달라졌다.
---p.34
원도의 머릿속에는 버튼 하나로 원도를 박살 내버릴 시소가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 있고,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그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생각은 무게가 없다. 유령처럼 존재하는 그것은 유령처럼 사람을 홀린다.
---p.42
원도의 틀린 점을 일일이 기록하는 오답 노트가 있다면,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읽어도 다 읽을 수 없는, 너무 두꺼워서 읽다 보면 무슨 노트를 읽는지조차 망각할 만큼 기나긴, 오답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흡사 정답 같기도 한 목록이기에 결국 오답을 정답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는 그런 노트가 될 것이었다. 오답 노트의 39405837쪽 정도에 기록될, 아이도 어른도 아닌 원도가 생각한다.
---p.56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 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 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 내 몸에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엄마. 원도가 운다. 무서워서 운다.
---p.67
한순간 한꺼번에 닥치는 불행이란 없다. 징조가 있다. 시작이 있다. 보고도 본 줄 몰랐던, 겪고도 겪은 줄 몰랐던, 듣고도 들은 줄 몰랐던 유령 같은 시작. 단 한 방울의 독으로 모든 그림이 바뀐다. 분명 그럴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죽지 않기 위해 기억해야 한다. 이 지옥에서 탈출해야 한다.
---p.74
죽는 순간에야 멈출 것이다. 좌절도 절망도 두려움도, 감정의 태풍과 해일도 그제야 끝날 것이다. 죽음은 모든 것을 제압하는 절대 패, 가장 강력한 조커다.
---p.75
인간의 마음에는,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분명 존재하는 그 중심에는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어떤 공간이 있는데, 아주 사소한, 빗방울 하나보다도 작은 공간이 있는데, 마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딱딱한 맨틀 같은 것이 둘러싸고 있어서 무엇도 그 중심에 닿을 수 없고, 닿을 수 없으니 채울 수도 없고, 그래서 그 공간은 텅 비어 있을 수밖에 없는데, 닿을 수도 채울 수도 볼 수도 없지만 그곳에 있기에 분명 느껴지는 그 빈 곳은 결국 저주이고, 신이 인간을 완벽하게 사랑하기보다, 사랑하면서도 증오하여 만든 마음의 구멍이고,
---pp.91-92
그런 기억은 느닷없이 벽을 뚫고 튀어나오는 주먹과 같다. 누구의 것인지도, 무엇을 겨냥하는지도 모를 단단한 주먹. 피해야 할지 잡아야 할지 펴야 할지, 편다면 그 안에 꽃잎이 있을지 잘린 혀가 있을지 터진 눈알이 있을지 다이아몬드가 있을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당신이 최고라는 말, 사랑한다는 말, 성취감, 얄팍한 위로, 마지못한 인정, 신기루 같은 환상, 모두 거짓이었다. 그리워 돌아보면 터무니없이 황폐한 그 자리. 순간의 진심 따위 아무짝에도 쓸모없다.태어나자마자 죽음을 향해 돌진하는 생명. 완성하기도 전에 썩어가는 음식. 진심이란,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일 초 전의 세상과 일 초 후의 세상은 다르다. 절대 같을 수 없다.
결국 혼자 남았다.
---p.94
피할 수 없는 악취와 독기 속에서, 원도는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차차 괴물이 되어갔다.
---p.102
울고 싶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울고 싶진 않다.
---p.128
아무리 탕진해도 넘쳐나는 생. 바닥없는 기억. 전체가 그림자인 검은 방에 내던져진 원도. 내내 떤다. 고독하게 떤다. 고독하게 떨며 그리워한다. 그리워하며 원망한다. 그날 그 밤 아프도록 환했던 당신의 웃음을. 이건 게임이다. 전 재산을 건 게임이다.
---p.149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 육체와 정신은 살짝 미치면서 강해진다. 싸우려는 것이다. 내 안에 침투한 그것, 나를 해치려는 병균, 흔히들 사랑이라고, 당신이라고 부르는 그것과. 사랑에 빠져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증상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고열, 두통, 근육통에 시달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타인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랑할 수는 없다. 때로는 그것에 완벽하게 삼켜지길 바라는데, 결국 완전히 삼켜지지 못하고 팔이나 다리나 머리통만 씹힌 채 뱉어지고 만다. 불구가 되어 다시 나를 삼켜줄 또 다른 괴물의 입 주변을 기웃거린다.
---p.153
그것은 잘못이라기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그저 삶이었다. 하루하루였다.
---p.163
인간은 단 한 순간도 역할 없이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생명에 대한 담보와 같다. 역할 혹은 상징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자유를 뺏긴다. 아니다. 원래 없는 것이므로 뺏긴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다. 살아 있는 이상 자유는 없다.
---p.168
파산자에 범죄자에 도망자가 되어, 가족에게 버려진 채 매일 피를 토하면서도, 이 지경으로도 죽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유인가.
---p.175
무조건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나 희망 같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공포나 불안인지도 모른다.
---p.187
미래는 없다. 현재는 순간이다. 기댈 것은 차곡차곡 쌓인 기억뿐이다. 죽거나 살아야 하는 데 이유가 있다면, 이유가 필요하다면, 과거를 뒤질 수밖에 없다. 눈을 감으며, 원도는 쉬지 않고 기억한다.
---p.192
돌고래는 어째서 돌고래고 나는 어째서 나야? 하고 물을 만큼 세상 모든 것이 궁금했고 세상 전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원도는 어느 날부터 질문을 참는 아이가 되었고 순식간에 질문을 두려워하는 어른이 되었다.
---p.218
원도에게 어머니는 분명 존재했지만 그 자리는 비어 있었다. 텅 빈 그곳을 온갖 상상과 환상으로 채우다 어느 순간 잊었다. 잊고 살다 가끔 절감했다. 절감할 때마다 사랑하고 싶었다.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아니다. 사랑받고 싶었다. 누구에게든. 무엇에게든.
---p.221
일어나려면 일단 앉아야 한다. 걷기 위해선 먼저 멈춰야 한다. 함께하길 원한다면 우선 혼자여야 한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기억해야 한다.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기억하고 선택해야 한다. 미룰 수 없다. 거부할 수 없다. 주저앉았던 원도가 일어난다.
---p.240
그러니 먼저 바라는 것은 나부터 나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나를 배반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지금 소통의 불가능을 믿는다. 타인의 몰이해를 믿는다. 그 믿음이 나의 입구며 출구다.
---「초판 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