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에 찬 눈으로 삶을 바라보는 앤의 태도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다시 보게 된다. 그래서 말인데 ‘Isn’t it splendid to find out what Anne Shirley said about life?’(앤 셜리가 삶에 대해 뭐라 말했는지 알아보는 일, 참 멋지지 않은가?)
--- p.9
원래 ‘take a note’의 뜻이 ‘필기하다’라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듯, ‘take a mental note’는 ‘머릿속에 필기하다’라는 뜻으로, ‘눈으로 본 무언가를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저장해둔다’는 의미이다. ‘make a mental note’라고도 한다. 린드 부인이 열고 들어온 문을 채 닫기도 전 짧은 순간에 독수리눈으로 (영어로도 역시 ‘eagle eye’라고 쓴다. 아마 영어에서 우리말로 들어온 표현이 아닌가 싶다) 전방을 파악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된다.
--- p.13
소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에 가정법이 풍성하게 쓰이고 있다. ‘all the things that might have happened to you’부터 보자. ‘might have 과거분사’는 ‘…할 수도 있었던’이란 뜻이다. 자신을 데리러 오기로 한 아저씨가 못 오도록 ‘일어날 수도 있었던 온갖 일들’을 상상하고 있었다고 하지 않는가. 이어지는 문장 속 ‘I would go down… and climb up…’도 모두 가정법이다. ‘wouldn’t be afraid, it would be lovely’ 역시 가정법이고, ‘대리석으로 꾸며진 넓은 방에…’에 해당하는 말까지 죄다 그렇다.
--- p.19
마릴라는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매튜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문을 연다. “Well, this is a pretty kettle of fish.” ‘kettle of fish’는 주로 ‘a fine kettle of fish’ 혹은 ‘a pretty kettle of fish’라는 표현으로 사용하는데, 무척 어색한 상황에 처했을 때 하는 말로 “이거 참, 일이 꼬였네요.” 정도의 뜻이다. 아직 아이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마릴라는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인식하고, 날이 밝으면 아이를 돌려보낸 후 이 문제를 바로잡겠다고 한다.
--- p.26~27
마릴라의 마음에 일어난 동요를 작가는 “Pity was suddenly stirring in her heart for the child.”(아이를 향한 동정심에 마음이 흔들렸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어에서 감동하거나 울컥한 마음을 묘사할 때 쓰는 동사 중 하나가 ‘stir’이다. 원래 ‘(액체를 스푼 등으로) 젓다’라는 의미의 동사인데, 이 단어를 보면 우리의 마음이 물결이고 무언가가 그 물결을 저어 동요하는 이미지가 연상된다.
--- p.37~38
앤의 매력은 이런 데에 있다. 틀에 갇힌 어른들과 달리 틀 밖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발견하게 해주는 것. 이것은 어린아이를 키우며 느끼는 큰 기쁨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릴라는 앤에게 성경 공부부터 시켜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마릴라가 변하리라는 것을.
--- p.49
이 소설에서는 ‘절친한 친구’를 ‘bosom friend’(‘가슴으로 품는 친구’ 정도의 뜻이다)라고 하는데, 요새는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 주로 ‘bff’라고 한다. ‘best friend forever’의 약자로 여학생들이 즐겨 쓴다. 앤과 다이애나는 흐르는 강물 위 다리에 서서 영원히 친구가 되겠다는 맹세를 한다.
--- p.74
어린이가 조건문을 온전히 이해하는 나이는 만 열두 살 정도부터라고 한다. 실제 아이를 키우다 보니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하면, 장난감 가지고 못 놀아!”라고 말하면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아이는 앞의 조건문은 이해하지 못하고, 뒤의 ‘가지고 못 놀아’만 이해할 수 있다는 걸 나중에 아동 발달 단계를 공부하면서야 알았다.
--- p.86
앞의 인용문에서 가장 흥미로운 표현은 ‘once in a blue moon’이다. 직역하면 ‘어쩌다 한 번씩 푸른 달이 뜰 때’라는 의미인데, 어원을 찾아보면 진짜로 파란색 달이 뜨는 건 아니고 고대영어에서 ‘belewe moon’이 ‘blue moon’으로 바뀐 것일 뿐 원래 뜻은 ‘betray’, 즉 ‘배신하는 달’이라는 뜻이다. 원래 보름달은 한 달에 한 번씩 뜨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달의 공전 주기는 29.53일이라서 몇 년에 한 번씩은 한 달에 두 번 보름달이 뜨게 된다. 이렇게 한 달에 두 번째로 뜨는 보름달은 배신하는 달이라고 해서 ‘blue moon’이라 하고,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라서 ‘드물게’라는 뜻으로 쓰인다.
--- p.92~93
‘appreciate’란 단어는 ‘감사하다’, ‘감상하다’라는 뜻 이전에 ‘어떤 것 혹은 누군가의 가치를 있는 그대로 알아주다’라는 뜻이 있다. 도움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것이 ‘감사하다’, 특정 예술작품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주는 것이 ‘감상하다’이니, 의미가 이 뜻에서 뻗어나왔다고 생각하면 된다. 뿌리 없는 존재 같았던 고아 소녀에게는 친구들이 그저 자신을 좋아해주는 것보다,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봐주는 것이 어쩌면 더 절실했던 것도 같다.
--- p.107
다정이 병인 것처럼, 상상력이 지나쳐 문제였던 앤은 이렇게 절제를 배운다. 어른들만 앤을 통해 변하는 게 아니다. 아직 어린이인 앤도 변한다. 자유에도 경계가 있음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상상력에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음을 이렇게 배운다. 앤 속의 수많은 앤 중 한 명이 또 이렇게 생겨난다.
--- p.131
앤에게만 감정을 이입해서 읽었던 어린 시절을 지나, 마릴라의 나이가 되어서 『빨강 머리 앤』을 다시 읽자니 이제는 앤의 심정도, 마릴라의 심정도 다 공감되는 부분이 있다. 특히 마릴라가 어떤 마음으로 앤을 바라보고 있는지 이제 이해가 간다.
--- p.138
양육이라는 그림은 전경(foreground)과 배경(background)이 어우러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때로는 눈에 띄지 않는 배경이 전체 그림을 살려주는 것처럼, 양육 역시 배경에서 묵묵히 버티고 있는 이의 애정이 큰 그림을 완성한다.
--- p.152
장작이 불에 타면서 내는 ‘탁탁’ 소리를 영어로는 ‘snapping’한다고 표현한다. 손가락을 튕기는 것도 ‘snap’이고 장작이 타는 소리도 ‘snap’이다. 무언가를 갑자기 분질러버리는 소리도 ‘snap’이라고 하고, 말을 딱딱거리며 쏘아붙이는 것도 ‘snap’이라고 한다. 각기 다른 뜻 같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의미들이 왠지 다 하나로 묶여 잘 통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이미지들을 통합해서 머릿속에 저장하면 더 잘 기억될 뿐 아니라 이후 불러내어 사용할 때에도 단어가 주는 뉘앙스에 맞게 잘 쓸 수 있다.
--- p.166
빨강 머리 앤이 상상의 날개를 펼치고 현실에서 붕 뜬 채 미사여구와 문학에서 빌려온 말들을 재잘대는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다. 문학 속의 아름다운 말들로 자연 혹은 현실과 다른 삶을 그리는 상상력은 앤이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며 겪은 힘든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러나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상상만으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매번 현실로 돌아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인 마릴라와 살며 앤은 드디어 현실로 내려오는 법을 배운다.
--- p.176~177
“모르겠어요. 이전만큼 많이 말하고 싶지가 않아요.” 앤은 생각에 잠겨 집게손가락으로 턱을 누르며 답했다. “소중하고 예쁜 생각들을 마음속에 보물처럼 담아두는 것이 더 좋은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을 말했다가 사람들이 비웃거나 갸웃거리는 게 싫어요. 그리고 어쩐 일인지 이제는 거창한 단어들을 쓰고 싶지도 않고요. 얄궂기도 하죠? 이제는 그런 말을 하고 싶으면 해도 될 만큼 컸는데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니요. 여러 가지 면에서 어른이 된다는 건 재미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기대하던 그런 재미는 아니에요, 마릴라. 배우고 생각하고 해야 할 게 너무 많아서 거창한 단어를 쓸 시간이 없어요. 게다가 스테이시 선생님은 짧은 단어들이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이라고 하셨어요. 우리에게 가능한 한 간결하게 글을 쓰도록 시키시거든요. 처음에는 힘들었어요. 저는 생각할 수 있는 멋지고 거창한 단어들을 그저 생각나는 대로 죄다 몰아 쓰곤 했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간결한 표현에 익숙해졌고, 이게 훨씬 나아 보여요.”
--- p.202
매튜는 어린 고아에게 필요한 양육자가 되어주겠다는 생각으로 시작한 여정의 끝에서 결국 자신의 삶에 이 아이가 정말로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릴라와 둘이서 외롭고 건조하게 하루하루를 반복하던 삶이 아이 한 명을 데려오면서 달라졌고,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아이의 눈을 통해 다시 경험하면서 자신의 삶이 그 어느 때보다 충만해졌음을 이제 알기 때문이다.
--- p.222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고들 한다. 죽은 이는 죽은 것으로 끝이고, 그 죽음 이후의 절차들을 처리하고 그 죽음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살아 있는 이들의 몫이다. 또한 죽음 이후의 슬픔과 상실, 고통 역시 살아 있는 자의 몫이다. 그래서 장례식은 살아 있는 이들이 삶을 다시 재편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앤과 마릴라는 친구들과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매튜의 장례식을 치른다.
--- p.243~244
앤은 19세기 영국의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의 시 한 구절을 조용히 읊조린다. 「피파가 지나간다(Pippa Passes)」의 첫 구절이다. “때는 봄 / 날은 아침 / 아침 일곱 시. / 산허리에는 이슬이 맺히고, / 종달새는 날고, / 달팽이는 가시나무를 기어가고, /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 세상은 모두 평안하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