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자에게 시 쓰기는 고통스럽고 쓸쓸한 삶 속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과정이었고, 이는 희진의 아픔에 거짓 없이 공감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국 그녀가 찾아낸 시의 아름다움은 고통에 대한 사과이자 속죄이며 진심을 담아 전하는 위로였다. 그러한 그녀의 위로는 손자의 죗값 치르기와 자신의 죽음이라는 대속 행위를 통해 완성된다. 미자는 사랑하는 손자를 결국 경찰에 넘긴다. 그리고 그날 밤, 시를 쓴다.
강좌의 마지막 날, 시를 쓴 사람은 그녀밖에 없었다. 시 쓰기가 너무 어렵다는 한 수강생의 말에 김용탁 시인은 답한다. “아니에요. 시를 쓰는 게 어려운 게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어려워요.”
시란, 진실과 따뜻함이 넘치는 삶의 방식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녀가 남긴 시 [아네스의 노래]는 희진에게 전하는, 마음을 다한 위로이자 먹먹한 아름다움이 된다. 더불어 그녀의 죽음은, 종교처럼 높고 순결하다.
---「영화 [시]에 관한 글」중에서
영화를 보면서 다소 혼란스러웠다. 정치와 우리의 삶, 이 둘 중 무엇이 더 소중한 것일까? 아마도 많은 이들이 우리의 삶 자체가 더 의미 있는 것이라 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당위적인 답변과는 별개로 정치적 고려 또한 결코 만만찮은 힘을 가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때로는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실질적인 힘으로, 때로는 사람들의 관계를 결정짓는 원리로, 때로는 거부할 수 없는 운명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을 삼켜버리지는 못하도록 해야겠다. 허위의 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때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는지는 푸른 난조와 가성공주의 이야기를 통해 충분히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영화 [자객 섭은낭]에 관한 글」중에서
삶과 글쓰기의 갈림길에서 숱한 번민을 지속했던 길 펜더. 그는 자정의 종소리를 따라 내면여행을 다녀온 뒤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쉽지 않은 선택을 한다. 지금껏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들과 결별하면서까지 파리의 소설가로 남기로 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아웃사이더다.
현명한 선택인지 확신할 순 없었지만 나는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는 숨겨왔던 내 속의 또 다른 내 모습인지도 몰랐으니까.
생각해보면 나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타협을 해왔던가?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뒤돌아보지 않고, 다들 그렇게 산다는 이유로 대충 넘어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결국 나는 내 속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에 제대로 귀 기울이지도 마땅히 보아야 할 것들을 똑바로 보지도 않고 살아온 셈이다. 이네즈와의 약혼이 잘못된 결정임을 알면서도 억지로 외면하던 길 펜더처럼. 그 속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소중한 것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 것일까?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관한 글」중에서
언젠가 감독은 [동주]를 만든 이유 두 가지를 밝힌 적이 있다. 그 첫 번째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이라면서 정작 TV나 영화에서는 그의 삶을 찾아 볼 수 없다는 현실적 괴리 때문이었고, 두 번째는 이들이 겪은 고통의 보편성 때문이었다. 그는 말했다. “어느 시대나 청춘은 있었고, 청춘은 언제나 시대 때문에 아파왔다. 지금의 세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윤동주와 송몽규의 시대가 아팠듯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살아가는 시대도 또 다른 방식의 폭력과 부조리 때문에 아프다. 바로 여기서 오늘날과 과거 사이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긴다. 그리고 이때 동주와 몽규라는 이름은 하나의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보통명사가 된다.
그들의 아픔은 동시대와 그들의 시대를 넘어선 오늘날까지 모습을 바꾼 채 여전히 반복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의 지침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영화 [동주]에 관한 글」중에서
문득 의문이 든다. 계백의 항전과 오천 결사대의 죽음에 과연 타당한 이유나 가치가 있었던 것일까? 언뜻 생각해보면, 계백의 전쟁은 자기가 몸담았던 삶의 터전과 소중한 가족 및 공동체를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 전 가족을 죽임으로써 이미 지켜야 할 소중한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나아가 삶의 터전 또한 반드시 백제라는 국가 체제 아래에서만 지킬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그가 수행한 전쟁의 타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결과 일어난 국가의 교체는, 물론 대단히 큰 사건이다. 하지만 백성의 입장에서만 보면 이는 단순한 지배계급의 교체에 불과할 수도 있다. 이 경우 백성들의 삶 자체에는 커다란 변화가 없다. 자신들의 나라가 백제든 신라든 국가 체제만 안정된다면 그들은 여전히 농사지을 것이고 가족과 오순도순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로 등장한 지배계급이 명분을 쌓기 위해 백성들에게 더 나은 정책을 펼친다면 백성들의 삶은 이전보다 못할 것도 없다.
---「영화 [황산벌]에 관한 글」중에서
프로크루스테스는 신화 속 괴물이다. 그는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나는 나그네가 있으면 집으로 초대한 뒤 극진히 대접한다. 이윽고 손님이 잠이 들면 자신의 쇠 침대에 눕힌 뒤 그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다리를 잡아 늘이고, 크면 잘라서 죽여버린다.
저마다의 다양한 키를 하나로 획일화하는 프로크루스테스, 그리고 그 기준이 되는 쇠 침대.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흔히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아집과 편견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의 또 다른 이름은 법과 제도이거나 사람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관습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쥬드]에 관한 글」중에서
현실에서의 사랑은 동화와 다르다. 아름답지도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다. [클로저]는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의 모습을 밑바닥까지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사랑에 대해 품고 있는 환상을 깨준다. 이들의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다. 섹스와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만 하는 것도 아니고, 따라서 순결과 진실된 사랑도 무관하다. 특히 댄과 래리가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참을 수 없이 가볍다.
이 때문이었을까? 낯선 세계를 탐험하던 알리스는 ‘존스-제인 레이첼’이라는 본명을 회복하고 원래 살던 세계로 돌아간다. 그녀가 탐험을 끝낸 이유는 간단하다. 진정한 사랑과 새롭고 근사한 삶을 꿈꾸었던 탐험은 실패로 돌아갔으며, 세상의 저곳도 결국에는 이곳과 별다를 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이제 제목의 의미를 생각해보자. ‘Closer’가 뜻하는 바는 무엇이었을까? ‘Closer’는 ‘가까이 다가가다’라는 뜻과 더불어 ‘관계의 끝’이라는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아울러 ‘부서져 반쯤 남은 벽돌’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알리스/제인의 탐험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는 결국, 사랑할수록 우리가 지켜야 하는 법칙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흔히 ‘가까워진다는 것’을 ‘금기의 허용 범위가 넓어지는 것’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클로저]는 사랑할수록 오히려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음을 알려준다.
---「영화 [클로저]에 관한 글」중에서
극중 사막은 삭막하다.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할 만큼 메마른 불모의 땅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사소한 이유로 죽어가고 그 주검은 모래바람 속에 덧없이 묻힌다. 이곳은 정적과 쓸쓸한 바람만이 지배하는 공간이며 외로움 속에 사람이 미쳐가는 공간이다. 따라서 여기에 모여드는 사람들도 하나같이 큰 상처를 가졌거나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구양봉뿐만 아니라 황약사, 모용언, 맹무살수, 홍칠, 심지어 살인청부 의뢰인들까지 모두가 그렇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막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사막은 물리적 실재이면서 동시에 심리적 공간으로서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한 은유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인물들은 이처럼 고독한 공간 속에서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가능한 답변 중 하나는 자기애와 잘못된 집착, 그리고 그것이 남긴 상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영화 [동사서독 리덕스]에 관한 글」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