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 뻬르피냥 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기계공학, Dr.Eng.)와 「카오스 이론에 의한 유체이동 연구」로 과학국가박사(물리학, Dr. d'Etat es Science) 학위를 취득했다. 유학시절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논문 제출상을 수상하고, 해외유치 과학자로 귀국하여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 등에서 연구 활동을 했다. 한국과학기술처 장관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문명과 과학, 역사를 넘나들며 많은 연구와 저술활동을 하고 있으며 100여 편의 논문과 80여 권의 저서를 출간했고 저술과 강연, 신문 잡지 등에 활발하게 기고하는 등 과학의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과학자들의 돈 버는 아이디어≫ ≪천재를 이긴 천재들≫ ≪과학 삼국유사≫ ≪과학 삼국사기≫ ≪세계사를 뒤흔든 발굴≫ ≪한국의 과학기술 이야기≫ ≪미스터리와 진실≫ 등이 있다.
베살리우스는 남성과 여성이 갖고 있는 치아의 수가 같다고 적었다. 그런데 베살리우스 이전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성의 이빨이 여성보다 더 많다고 믿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베살리우스의 지적은 단순했다. 여성과 남성의 이빨을 세어보기만 해도 되는데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그대로 답습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남녀의 이빨을 세어본 후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틀렸음을 발견했다. (p.32)
중세 암흑기에 비이성적인 광기의 결과로 나타난 것 중의 하나가 ‘마녀사냥’이다. 그 죄목은 다양했다. 악마와 계약을 맺은죄, 불법적인 악마의 연회에 참석한 죄, 악마에게 예배한 죄, 악마의 꽁무니에 입 맞춘 죄, 얼음같이 차디찬 성기를 지닌 남성 악마와 성교를 한 죄, 여성 악마와 성교를 한 죄,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닌 죄, 이웃의 암소를 죽인 죄, 우박을 불러온 죄, 농작물을 망친 죄, 아이들을 유괴하여 잡아먹은 죄 등등 죄목은 무궁무진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과학의 ‘참’을‘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며 마녀사냥으로 몰아갔다는 점이다. (p.40)
1753년 7월 26일 천둥번개가 치자 리히만은 전기 세기를 측정할 수 있는 측정계가 있는 곳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그는 전기를 유도하기 위해 걸어 놓은 금속이 만나는 지점에서 고개를 숙였다. 그때 하얀 빛을 띤 시퍼런 불덩이가 허공을 가로지르며 그 금속선을 타고 리히만의 머리로 들어갔다. 리히만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이마에는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고 몸에도 여러 곳 불에 그슬린 흔적이 남았다. (p.97)
쿡 일행이 태풍을 피해 다시 하와이섬으로 들어왔을 땐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원주민들의 분위기가 지난번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그의 배가 하와이 바닷가에 정박하고 있을 때 원주민들은 배에 있는 쇠붙이들에 특별한 욕심을 내어 심지어는 배 밑창에 박힌 쇠못까지도 빼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배에 딸린 소형 보트까지 사라지자 쿡은 대원 10명과 함께 상륙해서 추장을 붙잡아 원주민들이 훔쳐간 배와 물건을 돌려받을 때까지 인질로 잡아두려 했다. 그것이 쿡의 일생일대의 가장 큰 실수였다. 그가 상황을 잘못 판단한 것이다. 성난 원주민 수천 명이 그들을 포위하고 공격을 해오자 쿡 일행은 상륙선 10미터 앞까지 달아났지만 쿡은 원주민들의 창과 돌멩이 세례를 피하지 못하고 결국 살해되었다. 1779년 2월 14일의 일이었다. (P.117)
“인생의 성공 여부를 흔히 돈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사람은 자기가 씨를 뿌렸는데도 아무 수확을 거두지 못할 때 그것을 애석하게 여겨야 한다.” (P.210)
산모가 아이를 출산할 때 신생아가 산모의 좁은 산도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산모의 질과 회음부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는다. 출산으로 인한 상처는 저절로 낫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 상처를 통해 균이 침입하면 감염과 고열을 일으키는 산욕열(puerperal fever)이 발생하여 상당히 많은 산모들이 사망했다. 당시 유럽에서는 산욕열에 의한 산모의 사망률이 10?30퍼센트에 이를 정도로 공포의 질환이었다. 의사가 불결하여 오히려 환자들에게 치명적인 병을 옮긴다고 생각한 젬멜바이스는 손을 소독하지 않은 의사가 한 환자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산욕열을 전염시키는 것을 알아냈다. 산욕열의 감염 경로를 찾아낸 것이다. (P.220)
위대한 발견에는 언제나 전설이 따라다니듯 나일론의 발견에도 전설이 있다. 1932년 듀폰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폴리에스테르의 실험 재료들이 얼마큼이나 늘어나는지 알아보기 위해 장난으로 유리 막대기 끝에 작은 덩어리를 붙여 넓은 방안을 돌아다녔다. 그런데 이것이 실처럼 길게 뽑아졌던 것이다. (P.370)
콜로서스를 개발할 당시 동료 연구원들은 튜링을 썩 좋아하지 않았다. 멜빵 대신 새빨간 줄을 바지에 묶고 나타나는가 하면,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봄만 되면 꽃가루를 조심해야 한다면서 방독면을 쓰고 다니는 등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 동료들이 그를 결정적으로 싫어하게 만든 한 사건이 있었다. 튜링은 자신이 사용하는 컵을 다른 사람이 쓰는 것을 몹시 싫어해 동료들에게 자기 컵을 쓰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자신의 요구가 지켜지지 않자 자신의 머그컵을 남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난방기에 자물쇠로 채워놓았다. 튜링의 행동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동료들은 튜링의 관심을 다른 데로 돌려놓은 후 컵의 자물쇠를 풀었다. 튜링이 화가 나서 펄펄 뛰는데도 동료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를 삭이지 못한 튜링은 총을 가져와 동료를 향해 쏘았다. 그 일로 튜링은 도망갔지만 그가 극비 중의 극비를 다루는 인물이라 지명수배도 하지 못하고 그의 사진 한 장도 구할 수가 없자 그 사건은 흐지부지 끝났다. 얼마 후 튜링이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을 때 동료들은 더 이상 그를 놀리지 않았다. (p.3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