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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 (통합판)
eBook

호주와 나 때때로 남편 (통합판)

[ EPUB ]
안정숙 글,사진 | 책구름 | 2014년 07월 01일   저자/출판사 더보기/감추기
리뷰 총점8.8 리뷰 1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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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년 07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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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용량 EPUB(DRM) | 56.03MB ?
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3.5만자, 약 4.4만 단어, A4 약 85쪽?
ISBN13 9791195146765

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저자 소개 관련자료 보이기/감추기

저자 : 안정숙
1981년 전북 진안 출생. 대학 이전까지 전북 진안과 전주에서 자랐다. 경희대학교 국제관계학과를 졸업한 뒤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호주에서 머물기 이전과 이후에 국회의원 정책비서 일을 했다.
여행만이 자신을 가장 자유롭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국제정치를 전공한 것도, ‘국제’ 자가 풍기는, 흡사 여행을 떠올릴 때와 비슷한 자유의 느낌 때문이었다.
세계 일주를 목표로 틈날 때마다 여러 곳을 여행했지만, 호주를 다녀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중요한 건 일주가 아니라, 간절히 바라는, 심장을 뛰게 하는 무언가를 늘 가슴에 품고 사는 일이라는 것을.
그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 2013년 가을 전남 화순으로 이주해서 개, 닭, 토끼와 아이를 키우고, 글을 쓰고 책을 기획하며 살고 있다.
‘때때로 남편’ 시리즈 두 번째 이야기, 첫 아기 임신 출산에 관한 [아기와 나 때때로 남편] 출간 준비 중이다.
www.cyworld.com/elisabeth-ah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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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하도 넓다 보니 어디로 갈지를 정하는 것부터 난관이었다. 내가 찾는 곳은 간단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자리가 넘치는 곳. 가입해 둔 몇 군데의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는 이와 관련한 글이 매일같이 올라왔다.
나는 치밀한 작업에 돌입했다. 낮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살쾡이 같은 눈으로 각종 웹 사이트를 뒤졌고 밤에는 그날 모은 정보들을 추렸다. 호주로 워홀을 가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매년 3만 명에 육박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곧 주요 도시별 렌트비, 생활비, 업종별 인건비 평균이 나왔다. 이 정도면 눈 뜨고 사기당할 일은 없겠지. 공부를 이렇게 했으면 서울대도 가뿐했겠다고 킥킥대면서 잠시 숨을 골랐다. 그런데 한 인간이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누구는 남의 땅에서 먹고 살 궁리를 하느라 눈에 핏줄이 설 판인데 한가롭게 관광지 사진이나 들춰보며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누군 그럴 줄 몰라서 안 하는 줄 아나? 나도 구질구질하게 먹고사는 문제로 골치 썩기 싫다고!
그렇다. 이 여행을 망칠 잠재적인 위협요소는 가벼운 통장 잔액도, 일과 여행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부담도 아니었다. 바로 내 옆에 철썩 달라붙은, 그것도 모든 일가친척과 친구들, 신 앞에서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노라고 공표한 (눈치 없이 호주 관광지 사진이나 보고 있는) 저 남자였다.
---「프롤로그 /왜 하필 호주인데?」 중에서

자금 사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호주에 가기로 했지만, 여행지 자체로만 보면 최상의 선택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니 호주에 대한 시큰둥함은 꽤 뿌리가 깊었는데, 십 년 전, 어학연수 지로 내가 영국과 캐나다를 저울질할 때 호주, 그것도 시드니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퍼스로 가겠다는 룸메이트에게 “왜 하필 그렇게 어정쩡한 곳에 가려고 하느냐.”며 면박을 주었었다. 나에게 호주는 하도 많이 보고 들어서 지겹기까지 한 오페라 하우스에 지나지 않았고, 선진국 대열에 끼어 있긴 하나 북미나 유럽에는 한참 못 미치는, 하여튼 간에 애매하고 어중간한 나라였다.
그런데 이건 나만의 특수한 사정이 아니었다. 세계 일주를 하고 있거나 이미 마쳤거나, 아니면 계획 중인 고수들에게도 호주는 찬밥 신세였다. 잘 나가는 세계 일주 에세이에도 호주는 비중이 작거나 아예 빠져 있기 일쑤였다. 남미나 아프리카를 가는 게 소원인 사람은 수두룩해도 호주에 열광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다. 대체 왜, 호주는 세상의 관심에서 비켜나 있는 것일까.
---「프롤로그 /왜 하필 호주인데?」 중에서

나도 맘 같아서는 긴소매, 반소매 한 벌에 수건 하나, 선크림 하나만 챙기고, 비누로 머리를 감고 샤워까지 해결하며, 경비가 얼마 남았는지도 모르는 하드코어 여행자가 되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생긴 걸 어쩌랴. 나는 백만분의 일의 확률이라도 필요할 가능성이 있다면 계산기나 반짇고리 같은 것들마저 내가 쓰던 걸 챙겨가야 마음이 놓였다. 가볍게 여행하기엔 애초부터 글러 먹은 것이다. 더구나 세 끼 식사와 잠자는 일까지 모두 차에서 해결해야 하는 캠핑 여행의 준비물이라니.
---「/워홀러의 단상 1」 중에서

하도 벌이가 시원찮으니 기회만 왔다 하면 벗어날 궁리만 하는 처량한 신세들이라 눈빛이 초조했다. 하지만 버너를 가져와 라면을 끓여 먹거나 커다란 양푼에 비빔밥을 해먹는 소소한 기쁨마저 무시할 정도로 각박하지는 않았다. 쉬는 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 가지치기용 가위는 역시 독일제니 프랑스제니 하는 잡담을 했고, 점심을 먹고 나선 자치기를 하며 배를 꺼트렸다. 오후 내내 비를 흠뻑 맞으며 일한 다음부터는 굉장한 유대감마저 생겼다. 그놈의 돈이 뭐라고. 뭐로 보나 농장체질인 사람들의 꿈이 고기공장에서 일하는 게 되어버린 현실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워홀러의 단상 1」 중에서

나는 시큰둥했지만, 사실 아웃백은 유명하다. 페루의 마추픽추나 우유니 소금사막처럼 그 자체로 상징성이 있다. 미국 드라마 [로스트] 중에서에서 휠체어 신세였던 존 로크가 호주에 갔던 것도 아웃백을 체험하기 위해서였다.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지금 생각해보면 이유는 한 가지다. 생명체가 살아가기 힘든 혹독한 자연. 사람들은 거기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살아남는다면 앞으로 못해낼 일은 하나도 없을 테니까.
---「마리 /유치찬란함의 미학」 중에서

원래부터 감정을 통제하는 일에 익숙하지도 않지만, 나는 그에게 앞뒤 안 가리고 달려들었다. 그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는 한없이 유치해졌다. ‘어떻게 하면 그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있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를 안달하게 할 수 있을까.’ 온종일 한 사람 생각에 정신이 몽롱했다. 철저하게 그에게 휘둘리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었다. 콧대 높고 도도한 여자처럼 보이기는커녕, 울고불고, 매달리고, 조바심을 내고, 애간장을 태우고 질척거리며 처음인 티를 팍팍 냈다.
---「마리 /유치찬란함의 미학」 중에서

심한 비포장도로와 웅덩이를 지날 때는 왜 사서 이 고생인가 싶었다. 그래서 정갈한 아스팔트가 깔린 고속도로와 냉장고에 시원한 음료수가 가득한 세상으로 돌아오면 반가울 줄 알았다. 그런데 일정한 속도로 달리는 아스팔트 위의 자동차 행렬에 합류하려니 여간 밋밋한 게 아니었다. 온갖 동물들과 부시 인사를 나누던 아웃백 동지들을 떠올리면, 먼 땅에 두고 온 늙은 부모를 생각할 때처럼 마음이 아련해졌다. 맘껏 소리를 지르고, 노래를 부르고, 독수리의 엄호를 받으며 라면을 끓여 먹던 우리가, 수백 미터의 먼지 꼬리를 매달고 노을을 따라가며 질주하던 자유가 벌써 그리웠다.
---「우드나다타 트랙 /길들이기」 중에서

앨리스스프링스에서 눈에 띄는 건 단연 ‘원주민’이었다.
지금껏 어느 도시나 마을에서도 이렇게 많은 원주민이 도로와 공원, 도서관에 앉아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시내 중심가인 토드몰을 기점으로 원주민 공예품을 파는 상점이나 갤러리가 한 집 걸러 있었고, 공원 의자나 하다못해 쓰레기통에도 원주민 예술의 상징인 점과 꼬불꼬불한 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대부분은 하릴없이 무리 지어 다니거나 나무 그늘에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냈고, 일부는 잔디밭에 가방과 장신구 같은 것들을 펼쳐놓고 관광객들을 유인했다. 확실히 이들은 노던테리토리, 레드 센터의 아이콘이었다.
---「노던테리토리 /원래 주인 이야기」 중에서

드디어 황갈색이던 바위가 서서히 주황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이 한데 모이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의 얼굴에도 주황빛 물이 들었다. 난 그 빛을 일일이 담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함께하는 이가 있는 한 이 순간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정신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던 걸 멈추고 사진기 대신 그의 손을 잡았다. 그가 내 이마에 키스했다. 문득 지금 우리는 평생에 걸쳐 손에 꼽을 만큼 아름다운 한때를 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울루루?카타 튜타 국립공원 /영원함에 대하여」 중에서

여행 전 캠핑과 관련한 걱정이 두 가지 있었다. 진짜로 무료 캠핑이 가능할까, 얼마나 자주 씻을 수 있을까. 둘 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돈을 아낄 수 있을지에 대한 문제였다. 그런데 호주가 세계에서 제일 많은 캠퍼 밴을 보유한 나라로 꼽힌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로 호주는 캠핑 여행의 천국이었다.
---「눌라보 평원 /We are crossing the Nullarbor!」 중에서

마지막으로 포옹하고 서로의 건강과 축복을 기원하는데 가슴이 시리고 코가 찡해졌다. 단 몇 시간 만에 눈물 바람으로 작별을 할 수 있다니.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건 이렇게 즉흥적이고 열정적인 순간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에스퍼란스 /하니 구출 대작전」 중에서

저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난리였나 하는 후회는 없었다. 아니, 난 여전히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다. 나보다 더 그를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거였다. 내가 실망한 것은 ‘결혼 생활’ 자체였다. 행복했던 기억마저 왜곡되고 사라지기 전에 여기서 멈추는 것이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난 정말 끝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혼여행이 이별여행이 되다니. 그 실마리가 청소, 밥, 게임, 에어컨같이 시시콜콜하고 인생에 하등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라는 게 허망할 뿐이었다.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를 계단 삼아 내려갈 때처럼 어지러웠다. 올라갈 때가 더 어려울 것 같지만 등산도, 사랑도 내려갈 때가 훨씬 더 힘들었다.
---「스털링 산맥 /우리들의 연애시대」 중에서

난 늘 무언가를 하느라 바빴다. 한 번에 한 가지 일을 한 적이 없었다. 요리할 땐 영어 문법 동영상 강의를 틀어두었고, 대학 때도 학보사와 동아리 두 가지를 욕심내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못 했다. 일상에선 여행이 그리웠고, 여행할 땐 여행이 끝난 뒤의 일을 걱정했다. 그것이 때로는 내 몸과 마음을 망가뜨렸지만 멈추지 못했다. 그것만이 내 인생에 최선을 다하는 길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다.
---「퍼스 /반환점」 중에서

식도락의 나라 베트남 출신이니 담백한 쌀국수 정도는 먹을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나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그것이 철없는 생각이었음을 알았다. 간만의 외출에 들떠 깨끗하게 차려입고 화장까지 하고 간 것이 미안할 만큼 무척 낡고 초라한 집이었다. 거기서 다른 베트남 가족과 함께 여덟 명이 살고 있다고 했다. 커튼으로 대충 벽을 만들고 침대 하나를 들여놓은 공간에서는 신생아가 칭얼대고 있었고, 그녀에 재촉에 못 이긴 남편이 피곤한 몸을 질질 끌다시피 하며 거실로 나왔다. 그는 영어를 거의 못했다.
하필 선풍기가 헤어드라이어 같이 느껴질 만큼 무더운 날이었다. 좁은 식탁에는 게맛살과 새우 베이컨 말이, 감자튀김, 큼직하게 썰어진 토마토와 오이가 차려져 있었다. 낡은 집의 좁은 주방에서 씻고, 썰고, 튀기고 했을 걸 생각하니 차라리 오지 말 걸 그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맛있게 먹고 싶었지만 없는 살림을 축내는 것만 같아 그러지도 못했다.
---「칼굴리 /이방인」 중에서

퍼스를 벗어나 서호주 북부로 이동하자마자 우린 한 가지 위기에 봉착하고 말았다. 바로 40도를 예사로 넘기는, 한국에서는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더위였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일은 땀에 절어 끈적거리는 몸을 물티슈로 닦아내는 거였다. 한낮에 거리를 활보한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온종일 돌아가는 에어컨 바람에 머리가 아파 창문을 내리면 바로 훅! 헤어드라이어 수백 대가 동시에 내뿜는 것 같은 끔찍한 열풍이 눈과 코와 입속을 후벼 팠다. 한 여행자가 차량용 냉장고에서 막 꺼낸, 이슬이 송골송골 맺힌 펩시 캔 하나를 넋을 잃고 바라보다 결국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정말이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혹독한 날씨였다.
---「칼바리 국립공원 /더위, 파리, 진드기와의 전쟁」 중에서

호주는 그렇게 하늘을 보며 소원을 빌던 시절을 자주 떠올리게 했다. 그림으로 치면 여백이 많고 색채가 간결한 수묵화 같았다. 그래서 늘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게 했다. 그전까진 일정한 속도를 내야 하는 고속도로를 달렸다면, 지금은 한적한 국도를 달리는 기분이었다. 도시의 빠른 속도에 숨이 가쁘던 나로선 이 땅이, 시간이 감사할 뿐이었다.
그와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텅 빈 땅이 준 선물이었다. 아무리 달려도 사방이 지평선뿐일 때가 많다 보니 태양이나 구름, 바람, 더위, 가끔가다 튀어나오는 온갖 동물도 대화의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좋아하는 음악이나 소설, 각자가 생각하는 본인의 장단점, 특히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 그러다 보면 가슴 속 깊이 오래 묵혀두었던,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것들도 튀어나왔다.
---「카리지니 국립공원 /결핍의 아름다움」 중에서

그런데 저 거대한 생명체들은 뭐지?
방문을 열고 불을 켜는 순간,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내 주먹의 사 분의 일만 한 바퀴벌레 예닐곱 마리가 침대와 작은 서랍장 밑으로 헐레벌떡 숨어들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난 이제 막 도착한 이 도시에 오만 정이 다 떨어져 버렸다.
---「다윈 /우기와 바퀴벌레의 이야기」 중에서

여행하면서 (혹은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시간’의 놀라운 힘이었다. 화초 키우는 즐거움도, 비우는 만큼 채울 수 있다는 것도, 호주 오기 전까진 체감하지 못했던 것들이다. 여행도 그랬다. 처음엔 무작정 많은 곳을 가고 싶었다. 맘만 먹으면 1년 안에 세계 일주도 가능한 세상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좋아하는 장소 한두 곳을 마음에 새기는 일이 더 좋아졌다. 세계 일주가 목표였던 때보다 세상엔 멋진 곳이 너무 많아서 죽을 때까지 도저히 다 볼 수 없다는 것, 아니 다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은 지금이 훨씬 더 행복했다.
---「퀸즐랜드 /축복받은 녹색의 땅」 중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고, 새하얀 모래사장과 리스테린 쿨 민트 같은 연녹색의 영롱한 물이 서로 부드럽게 휘감고 있었다. 매우 아름다워서 작위적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그 정도로 말이 안 나오는 풍경이었다. 압도를 압도하는 풍경.
“아니 뭐 이런 데가 다 있어?”
남편은 경외심인지 불평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억양으로 계속 이 말만 반복했다. 난 산소가 부족한 붕어처럼 입을 뻐금거리며 카메라 셔터만 눌러댔다. 사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휫선데이 아일랜드 /값을 매길 수 없는 것」 중에서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안 하고 뭐해?
언제까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있을 줄 알아?
사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통일성을 강요해왔고 우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튀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며 살아왔다. 행복이나 이상 따위는 철없고 세상 물정 모르는 것으로 싸잡아 짓밟혔다. 이 축제는 그렇게 온 세상의 마이너리티들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기죽지 말고 함께 싸우자고, 행복하자고. 마디그라. 자유로운 시드니에 딱 어울리는 축제였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소리를 끌어모아 그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환호를 보냈다.
---「시드니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중에서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셈 치면 되지 뭐.”
대학 동아리 후배 종욱이가 우리 여행에 합류한 건 브리즈번에서였다. 기왕 선배가 리드하는 여행, 무조건 쿨 하게 베풀고 싶었다. 식비, 차량 유지비는 됐고, 기름값만 반씩 나눠 내기로 했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질수록 불편한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남편과 치고받고 싸우며 조율해온 것들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 것 같았다.
사건은 늘 별것도 아닌 일에서 시작됐다. 귀가 무척 민감한 편인 나는 대상이 누구든 간에 도저히 참지 못하는 것이 있었는데, 바로 쩝쩝거리는 소리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꽤 심한 편이었다. 밥을 먹을 때도 후루룩 쩝쩝, 커피나 포도주, 심지어 초콜릿을 먹을 때도 후루룩 쩝쩝, 라면을 먹을 때는 후루룩 쩝쩝쩝쩝쩝!
---「태지 /새로운 땅, 새로운 동행자」 중에서

혼자여도 외롭고, 둘이어도 외로운 우리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며 진실한 감정들을 토해내던 그날 밤. 난 어쩌면 울루루나 휫선데이 보다 지금 이 순간을 더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 남자와 함께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김치찌개를 먹고, 초콜릿에 포도주를 마시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부르고, 얼떨결에 야생 웜뱃과 고슴도치를 만났던, 사소하고 소박해서 일일이 언급하는 것조차 낭비처럼 느껴지는 평범한 것들을.
---「하르츠 산맥 국립공원 /결론은 해피엔딩」 중에서

나는 과연 앞으로 혼자 여행을 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한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은 행복일까 불행일까. 자유에 대한 욕망이 줄어든 것은 불행이겠지만, 그런 욕망의 필요성을 못 느낀다면 행복일 것도 같았다. 어쨌든 나는 그와 함께 있는 것에 무척 길들어 있었다. 그가 없는 세상은, 상상만 해도 심장이 욱신거렸다.
---「크래이들 산·세인트 클레어 호수 국립공원 /야생동물과 한판 대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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