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삶으로 이끄는 내면의 목소리를 알아차리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플라톤은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소크라테스의 명언 ‘너 자신을 알라’를 이야기하며, 지혜는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말한다. 스스로 끝없이 질문을 던지며 무지를 깨닫는 사람만이 세상과 자신에 대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스토아 철학의 완성자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서양 정신사에 큰 영향을 끼친 에픽테토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프롤로그 - 우리에게는 영혼을 위한 철학이 필요하다」중에서
우리는 어렸을 적 경이로움에 가득 찬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봤다. 그런데 자라면서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서서히 잃는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집요하게 캐묻지 않는다. 그렇게 서서히 고정관념에 갇힌다.
세상일에 대해 그리고 더 나은 삶에 대해 캐묻지 않고 검토하지 않고 음미하지 않는 삶은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하다. 더 좋은 삶을 상상하지 않으니 변화 역시 생기지 않는다. 뭘 해도 시큰둥하고 재미없는 일상에서 삶의 의욕을 얻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캐묻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중에서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세상의 관계는 모두 나와 나 자신의 관계가 어떤가에 달려 있다. 누구도 나를 대신해서 위로해 줄 수 없다. 타인에게 위로받으려 하지 말자. 누군가가 나를 돌봐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자.
삶이 괴로울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의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 안으로 은둔할 때 어떤 동요에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유지할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명상에 잠겨 움직이지 않고 자신에게 발생한 일들에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다. (중략)
인생의 답을 바깥세상에서 찾지 말자. 정신적으로 힘들고 허기가 질 때마다 자기 자신을 친구 삼아 질문을 던지자.
“내가 너를 어떻게 돌봐줄까?”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니?”
“너는 요즘 왜 그렇게 힘들어하니?”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는 삶에 균형은 없다. 작은 일에도 쉽게 휘청거리고 하루하루 쌓이는 불안감, 긴장감, 피로감에 기진맥진해질 뿐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망각하지 말고 돌보고 배려하고 집중하는 행위가 필요하다. 자기 돌봄이란 자기와의 관계를 주체적으로 구축하는 행위다. 진짜 내 모습을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지친 삶을 치유하는 경이로운 자기 돌봄의 시작이다.
---「무지를 깨닫는 자만이 스스로를 돌본다_무지의 지」중에서
플라톤은 『국가』 7권에서 ‘동굴의 비유’를 설명한다.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의 형 글라우콘에게 죄수들이 살고 있는 지하 동굴 하나를 상상해 보라고 말한다. 그 지하 동굴의 입구는 불빛을 향해 길게 열려 있다. 그런데 지하 동굴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날 때부터 다리와 목이 쇠사슬에 묶여 있어서 언제나 그곳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상태다. 심지어 고개조차 돌릴 수 없었기에 오직 앞쪽 동굴 벽만 바라보고 살아간다.(중략)
그런데 만약 죄수 중 한 명이 쇠사슬에서 풀려나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본다면 어떻게 될까? 죄수는 그동안 벽에 비친 그림자를 통해 봤던 그 모형들을 직접 보고는, 자신이 실물이라 믿었던 그림자가 실은 하찮은 것이라는 사실에 크게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거칠고 험한 오르막길 너머 동굴 밖으로 끌어낸다면 이데아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눈이 부셔서 당장은 아무것도 볼 수 없다. 불빛 때문에 고통을 느낄 뿐이다. 사물들을 제대로 보려면 ‘익숙해짐’이 필요하다. 그림자만 보고 살았던 죄수는 불빛에 서서히 익숙해진 뒤에야 실물을 볼 수 있다. 그런 후에야 그가 동료 수감자들과 동굴 안에서 보아온 모든 것의 원인인 태양을 보게 될 것이다.
이제 동굴 밖의 세계가 진정한 실재의 세계임을 깨달은 죄수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로 행복감에 휩싸인다. 그는 전에 자기가 살았던 동굴 안에서의 삶을 회상한다. 그곳에 남아 있던 나머지 죄수들이 불쌍해서 다시 동굴로 내려간다
---「우리는 그림자를 진짜라고 믿고 있지 않을까_동굴의 비유」중에서
물질만능주의가 최우선인 삶에 한계와 절망을 느끼고, 운명의 여신에게 무자비하게 휘둘릴 때, 바로 지금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근원적인 세계로 눈을 돌리는 일이다.
사실 최고의 진리와 가치를 인식하기란 힘들다. 플라톤이 말한 지성이란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부단히 정신적으로 노력해야만 비로소 우리의 혼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데아는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말로 설명할 수도 없지만, 플라톤에 따르면 그것은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실재다. 우리가 이러한 이데아의 세계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감각이 아닌 지성, 즉 직관이라는 인식 방식을 사용할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눈에 보이는 세계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세계가 전부인 것처럼 착각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바라보는 힘_지성」중에서
하지만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돈과 명예를 추구할 때도 불안해하거나 혼란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 지혜로써 자기 자신을 엄격하게 통제하면서 절대로 고삐 풀린 충동에 따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을 일관성 있게 처리한다. 결국 혼의 지적인 부분에서 즐거움을 찾는 사람은 더는 자신의 감정에 놀아나거나 노예처럼 휘둘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혜를 사랑하는 자는 경험과 사리 분별 또는 이성적 추론을 통해 괴로움을 유발하는 원인을 파악해 그 원인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왜 어떤 삶은 괴롭고 어떤 삶은 만족스러운가_지혜」중에서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풍요로운 동시에 불안한 시대에 살고 있다. 가난, 실패, 실직, 실연, 이혼, 퇴직, 죽음 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든다. 지금의 지위를 잃을까 봐 불안해하는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불안』에서 불안이란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에 이르지 못할 위험에 처해, 그 결과 존중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돈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사랑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시험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질병에 걸리거나 사고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렇게 어떤 대상에 대해 서로 대립하는 양가감정, 즉 상실감, 슬픔, 두려움 등의 감정이 기쁨과 희망 등의 감정과 함께 섞여 있을 때 불안이라는 감정은 항상 뒤따른다.
---「지나온 길을 사랑하고 다가올 미래를 환대하라_운명」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