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검찰은 OECD에 속한 다른 국가의 검찰과 달리 ‘수사권’, ‘경찰에 대한 수사지휘권’, ‘기소권’, ‘영장청구권’ 등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엘리트 집단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 군부의 총칼이 최고의 무력이었던 시간이 끝나가면서, 수사권·기소권·영장청구권 등 이른바 ‘검찰권’이 최고의 무력이 되는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법보다 주먹이 앞서는 시대가 끝나가면서, 법이 주먹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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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문재인 정부에 대한 공세를 펼치기 시작한 이후 누가 윤석열을 검찰총장으로 밀었느냐 등에 대한 비판적 문제 제기가 계속되었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당시 고위 공직자 검증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민정수석비서관으로서 윤 검사에 대한 진보·개혁 진영의 우호적 평가에 경도되어, 윤석열 검사에 대한 검증을 철저히 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자성한다. 민정수석실 내부에서도 윤 검사에 대한 평가가 갈리었는데, ‘검찰지상주의자’라는 비판을 더 심각하게 생각했어야 했던 것이 아닌지 자책한다. 요컨대, 다름 아닌 내가 최고 인사권자인 문재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역할을 충분히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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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소재를 알 수 있는 두 번째 질문은 “시민이 누구를 제일 두려워하는가?”이다. 권위주의 또는 군사독재 정권하에서 시민은 군부를 두려워했고, 중앙정보부 또는 안기부를 무서워했다. 그러나 현재 보통의 시민들은 군부나 국정원을 겁내지 않는다. 그 대신 검찰의 압수·수색, 체포·구속, 기소와 중형 구형을 겁낸다. 국가는 원래 ‘합법적 폭력’의 독점체다. 과거에는 총, 칼, 납치, 고문, 살해 등 ‘비법률적·초법률적 폭력’을 겁냈다면, 이제는 형벌권이라는 법률적 폭력을 겁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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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이 권력의 남용과 재벌의 탐욕을 규제하고 사회·경제적 약자를 보호하지 못하면, 법은 존경이 아니라 조롱의 대상이 되고 만다. 그러면 사람들은 “법이란 원래 그런 거야”라며 법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면 법은 타도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이제라도 법은 ‘정의의 여신’ 디케의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힘, 이익, 선입견, 편견 따위에 휘둘리지 않고 공정하고 공평한 저울질을 한 후 정의의 칼을 사용하는 여신이 필요하다. 이렇게 법이 만들어지고 집행되고 해석될 때 비로소 법은 자유를 위한 방패가 될 수 있고, 국가는 시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수 있다. 그러지 않고서 법을 지키라고 요구할 때 법은 새로운 억압과 차별의 도구로 작용할 것이며 ‘디케의 눈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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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법치’는 엄벌(嚴罰)주의, 혹형(酷刑)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형벌권을 사용한 반대파의 숙청을 정당화하는 원리도, 피지배층을 형벌권으로 위협하며 복종을 강압하는 원리도 아니다.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Nemesis)가 아니다. 술에 취해 칼을 휘두르는 망나니는 정의의 상징이 아니다. 법의 이름을 빌린 근육질 권력 행사, 인간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없는 법률 해석과 적용은 ‘법치’와 거리가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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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법은 인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형법은 단지 범죄를 처벌하는 것만 아니라 인권을 보호하는 것도 사명으로 하고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형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대원칙으로, 이를 통해 국가형벌권의 오남용이 통제된다. 묵비권, 변호인접견권, 고문금지 등 형사절차상의 권리를 통해 피의자와 피고인의 인권이 보호된다. 형법은 범죄와의 투쟁 도구인 동시에 국가형벌권에 의해 시민이 부당하게 억압받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 나는 이 묵직한 학문 분야가 좋아졌다. 특히 형사법을 헌법정신에 비추어 분석하는 학문방법론에 매료됐다. 이는 ‘헌법적 형사법학’이라 명명할 수 있는데, 형사법 조문의 틀 안에서만 맴돌지 않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형사 법률과 판례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방법론이다. 이러한 방법론을 취하면 형사 법률이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민주주의와 인권의 관점에서 보아 정당한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게 되고, 정당하다 하더라도 그에 가해지는 제재가 적정한지, 그 법률을 집행하는 절차는 적정한지 등을 검토하게 된다.
--- p.170
2022년에는 연세대에서 청소, 경비 노동자들이 약 5개월간 학생회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시위를 벌이자 연세대 학생이 수업권을 침해받았다며 이 노동자들을 업무방해죄로 고소하고,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로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으로 고발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와 별개로 다른 연세대 학생 3명은 청소노동자들을 상대로 수업권 침해에 따른 민사상 손해액 638만여 원을 배상하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업무방해 및 집시법 위반에 대해서는 2023년 경찰이 불송치결정을 내렸지만, 손해배상소송은 진행 중이다. 대학생들의 삶이 아무리 팍팍해졌어도, 또는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노동자와 무관한 것으로 인식·전망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경제적 약자에 대한 공감이 이다지도 약해졌는가 싶어 씁쓸했다.
--- p.285
순간순간 ‘갈림길’과 ‘막다른 길’을 만났다. 힘들고 지쳐서 무너질 것 같은 때가 있었다. 퍼붓는 폭우를 같이 맞으며 위로와 격려를 해준 시민들, 벗, 친구, 동지들 덕분에 견디고 버틸 수 있었다. 나는 흠결과 한계가 많은 사람이다. 나의 “중대한 잘못”을 직시하고 성찰하면서 ‘갈림길’에서는 쉬고 ‘막다른 길’에서는 길을 내며 걸어갈 것이다. 누가 나를 위해 ‘꽃길’을 깔아줄 리 없고 그것을 기대해서도 안 된다. 이제 내 앞에 멋지고 우아한 길은 없다. 자갈밭과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한다.
--- p.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