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우리 앞 뒤 글자를 바꾸어서 한번 말해 봅시다. 이를테면 충고는 고충이다,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충고는 고충일까. 듣는 쪽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제 완전히 그의 페이스에 말려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유혹하는 대로 그의 언어 잡화상 속으로 끌려들어가 뒤죽박죽이 된 언어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려보기 시작했다. 기역으로 시작되는 판매대에 나는 서 있었다. 거기서 나는 충고와 고충의 경우처럼 글자를 바꿔놓아도 말이 되는 단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군대는 대군이다, 말이 되나요?”
“됩니다. 그럼 이제 또 제가 말해야 할 차롄가요. 그러나 아가씨, 우리 그냥 하면 재미가 없을 테니까 벌칙을 정합시다. 상대편이 말하고 나서 일 분이 경과해도 적당한 단어를 못 찾아내었을 경우 오백 시시의 반을 벌주로 단숨에 마신다든가 하는.”
나는 재빨리 계산해 보았다. 조금 전에 군대는 대군이다를 생각하는 데 나는 약 이십 초를 허비했다. 어쩌면 그보다 빨리 생각해 낼 수 있을는지도 모른다.
― <여름 우박> 중에서
밖에 나오니 햇빛이 눈부셨다. 모든 수목들이 햇빛 속에서 푸르고 건강하게 자라 오르고 있었다. 잔디밭에는 학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아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있었다. 나와는 모든 것이 거리가 먼 풍경 같았다. 이제는 끝났다…….
너무도 어렵게 들어와서 너무도 어렵게 다니다가 너무도 쉽게 끝나버린 것 같았다. 문득 눈시울이 젖어와서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구어버렸다.
몹시 배가 고팠다. 나는 이틀 동안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아까부터 창자는 보채고 있었다. 배고프다, 밥 좀 주라, 배고프다, 밥 좀 주라, 보채면서 나를 자꾸만 비참하게 만들고 있었다. 참아야지. 창자야 너도 자존심이 있지. 배고픔 정도는 참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거듭거듭 타이르면서 천천히 교문을 벗어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무엇을 팔아야 하나…….
― <텅 빈 건물에서 혼자 살기> 중에서
나는 그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마침내 80호 정도의 대형 캔버스 앞에서 아, 하는 탄성을 나도 모르게 뱉어내고야 말았다. 내 예감은 적중했던 것이다. 완전히 몰락해 있는 어느 폐가에 수없이 많은 들개떼들이 몰려와 있었다. 건물의 유리창틀을 붙잡고 기어오르는 놈, 쓰레기통을 뒤적거리는 놈, 지붕 위에 버티고 서 있는 놈, 현관 앞에 누워 있는 놈…….
하여튼 어디에서든 들개들은 눈에 띄었다. 그것들은 모두 굶주려 있는 것 같았다. 한결같이 늑골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다. 역시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림을 보는 사람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흉계 같은 것이 틀림없이 그 그림 속에는 도사리고 있었다.
― <가을 부근> 중에서
“쥐고기다!”
틀림없는 쥐고기였다. 본능적으로 소름이 끼쳐왔다. 며칠간 나는 그가 내밀어주는 쥐고기 몇 점씩을 받아먹고 가까스로 목숨을 연명해 왔었던 것이다. 아…….
마침내,
마침내, 라고 나는 생각했다. 지금까지 지탱하고 있던 먹이 문제에 관한 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은 이제 모두 끝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쥐고기를 먹었다, 라는 사실이 나는 다른 것도 먹을 수 있다, 라는 자신감을 가지도록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차라리 하나의 벽을 무너뜨려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차츰 불쾌감이 사라져가는 것이 이상했다. 이 극한 상황을, 완전히 뛰어넘어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 <하나님은 왜 사람을 먹어야 사는 동물로 만든 것일까> 중에서
나는 도망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시체에 빨려들 듯 다리를 후들거리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몇 마리의 커다란 쥐들이 그의 시체 위를 기어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체 곁에는 역시 죽은 채로 개 한 마리가 모로 누워 있었다. 그들은 마치 서로 굳게 껴안을 듯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마룻바닥에는 피가 질펀하게 깔려 있었다.
그는 눈과 귀와 입술이 찢겨져 있었다. 쥐들이 저질러 놓은 흔적 같았다. 그동안 내가 준 모든 양식들을 그는 아마도 쥐들에게 모두 던져준 모양이었다. 사과며 밤 따위의 과일들과 빵 부스러기, 라면 따위들이 마룻바닥에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고 거기엔 모두 쥐가 이빨로 갉던 흔적이 역력해 보였다.
― <마침내 남아 있는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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