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각국사(眞覺國師) 혜심(慧諶)의 생애에 대해서는 [월남사지진각국사비(月南寺址眞覺國師碑)]와 이규보(李奎報)가 찬한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을 통해 알 수 있다. 혜심은 1178년 전라도 나주 화순현(和順縣)에서 향공진사(鄕貢進士)인 최완(崔琬)을 아버지로, 배씨(裵氏)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재주가 있었던 그는 어머니의 명에 따라 유학을 공부하여 24세인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뒤 태학(太學)에 들어가 학문을 닦게 된다. 그러나 모친이 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받고는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모친은 이듬해에 작고하고 만다. 본래부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기에 1202년, 조계산 송광사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을 모시고 승려가 되었다. 이후 용맹정진(勇猛精進)하던 그는 보조국사로부터 다양한 시험을 통과한 뒤 1210년, 지눌의 법석을 공식적으로 이어받는다. 지눌로부터 이어받은 수선사(修禪社) 2대의 자리는 당시의 사회적·종교적 측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였다. 수선사는 당시 왕권과 결탁하여 온갖 부패와 모순을 낳았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를 보며 지눌이 결성한 실천적인 결사운동이었다. 지눌의 이러한 결사운동은 당시 실질적인 정치권력을 행사하던 최씨 무신정권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주위에 몰려 있는 정적(政敵)들에 대한 공포심을 줄여줄 정신세계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당시 불교의 타락을 비판하고 나선 지눌의 결사운동이 지닌 혁신성이다. 무신정권이 만일 이러한 수선사의 지원을 얻는다면, 그들은 자신의 정권을 정당화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셋째, 복잡한 교리에 어두운 무인들에게 선종사상이 내세우는 수심(修心)에 의한 직시 위주의 단순성은 기존의 교종과는 달리 친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최씨 무신정권과 수선사는 현실적인 필요에 의해 물질적인 지원과 정신적인 후원을 서로 교환함으로써 밀착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혜심은 항상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종교인의 본분을 다하는 데에 힘을 쏟았다. 그는 종교인이 권력과 밀착되었을 때 생기는 부작용을 알고 있었기에, 승려 본연의 자세와 개혁 정신을 유지하면서 수선사를 당시 정신계의 핵심으로 이끌 수 있었다. 이후 혜심은 20여 년간 수선사를 이끌다가 1234년 6월 26일 57세(법랍 32)의 나이로 월등사(月燈寺)에서 입적했다. 스님이 남긴 책으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선서(禪書)로서 선가(禪家)의 고화(古話) 1125칙(則)과 선사들의 염송(拈頌)을 합쳐서 총 30권으로 완성한 [선문염송(禪門拈頌)]과 생전에 행하신 각종 법어를 모은 [조계진각국사어록(曹溪眞覺國師語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