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써, 읍당께.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넘치던 ‘끼’를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무작정 서울로 가겠다며 가출을 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한 곳은 여수였다. 여수에 있는 악극단에서 사오 년 노래를 불렀다. 악극단 생활에 싫증을 느낄 즈음, 둘째 누님에게 “목덜미 잡혀갖고 질질 끌려”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잠시, 이번엔 약장수를 쫓아다녔다. 악극단에서 노래를 부를 때는 제법 대접을 받았지만, 약장수를 쫓아다닐 때는 무시를 많이 받았다. 시골 오일장에서 약장수의 등장은 누구에게나 큰 구경거리였다. 약을 팔기 위해 호객행위를 해야 했고 대접도 좋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곳에서도 삼사 년을 일했다. 그후 떠돌이 생활을 접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궁핍한 생활은 여전했다. --- p.27
“낳기는 일본서 낳고”
당시 일본에서 가지고 들어올 수 있는 돈은 일 인당 천 원밖에 되지 않았다. 일본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그의 가족이 광복 직후 한국으로 돌아올 땐 그의 표현대로 “맨손”밖에 없었다.
당시 천 원의 화폐 가치를 추정해보면 “군정청에서는 도시와 농촌의 쌀 불균형으로 인해 미곡수점령을 발동시켜 농가의 쌀 한가마 90근(54kg)을 백오십원에 수매하여 도시로 배급하였다”(1946년 2월 2일 〈동아일보〉 6면 기사 참조)고 하니, 천 원으로 쌀 삼백육십 킬로그램을 살 수 있었다. 요즘 시세로 따져보면 쌀 십 킬로그램을 넉넉 잡아삼만 원으로 봤을 때 대략 백만 원 정도인 셈이다.
“낳기는 일본서 낳고, 삼십육년생잉께 지금 일흔여섯이제. 거서 국민핵교 삼학년 댕기다가 팔일오 해방돼서 여그로 왔응께. 그때 해방돼서 나왔는디, 할 게 뭐 있어? 암것도 읍제. 암것도 읍써. 맨손으로 나왔는디, 참 내 불쌍허게 살았당께.” --- p.34
“울 아부지가 총각이라고 거짓깔쳤어”
“일본 가서는 울 아부지가 총각이라고 거짓깔쳤어. 열너이 살 묵어서 장개를 갔으니 총각이제. 허허. 그래갖고 일본서 울 엄니를 만내갖고 나를 그런 것이요. 근디 한국서 누님 싯 낳는디, 다 여가 놔둬삐리고 정가 땜시 혼자 일본으로 갔단 말이여. 송씨 아줌씨는 못살아 인제. 딸만 싯 데리고 어찌 살겄는가. 안 근가? 일본 순사헌티 우리 신랑 얻다 보냈냐, 매일같이 거 가서 따진 거여, 누님 싯 데리고 가서 떼거지 쓰니께 어쩔 수 없었던 가벼. 아부지 계신 주소를 갈켜줬어. 그래 일본 오사카로 찾아왔단 말씨. 딸 싯을 델고 와서 본께로 울 아부지가 울 엄니를 델고 살거든. 긍께로 어쪄. 아버지가 송씨 아줌씨헌티 ‘니는 딴 데로 가뿌리라. 딸은 내가 맡으마’ 그런 거여. 그래서 송씨 아줌니가 딸 싯을 맡기고 딴 데로 가부린 거제. 그라니께 송씨 아줌니는 따지자믄 우리 큰엄니지. 긍께로 나가 엄니가 둘이제. 송씨 큰엄니하고, 울 엄니. 울 엄니가 후처지.” --- p.41
“거가 계속 있었어야 했어”
“한국 간다니께 일본사람들도 못 나가게 혀. 여서 같이 살자. 그렸제. 근디 우리 아부지는 꼭 나가자 혀. 왜 나가야 허냐고 나가 이유를 못 달어. 어찌 엄한지. 그때허고 지금허고 틀리제. 지금은 막 대들란가 몰라도 그땐 시대가 그랬당께. 그렇게 된 것이여. 거가 계속 있었어야 했어. 거가 계속 있었어야 했는디 말씨.”
그가 아직도 일본 집 주소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이제야 납득이 된다. 그의 기억 속에는 유복했던 일본에서의 생활이, 노래를 좋아하고 잘해서 가수를 꿈꿨던 그 시절이 늘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것은 어쩌면 다시는 건너지 못할 바다를 건너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안타까움과 그리움, 그리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는 현실에 발을 디뎌야 하는 애통함과 막연한 원망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각인이 아닐까. --- pp.51-52
“서울로 갔으믄 출세혔을지 모를 거인디, 어쩌다 남쪽으로 간 거여”
일본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나기 전에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친정식구들을 일본에 두고 남편 따라 한국으로 나오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차별 때문이었다. 공부를 잘하면 ‘조센진이 공부를 잘하네’, 공부를 못하면 ‘조센진이니까 공부를 못하네’ 하고 놀림을 받았다. 식민지 국민이기에 당해야 하는 그 소리가 듣기 싫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유학 온 외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자식들만큼은 그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외할머니는 장모님을 낳은 후 한국행을 결심했다. 분명 그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리 일본에서 부를 이루고 살았다고는 하지만, 어느 정도의 차별은 겪었을 것이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와서 그것도 당신의 자식이 받는 냉대와 무시는 그 어떤 것보다 분통터지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애꿎은 자식만 나무라며 여생을 보냈다. 어렵게 밟은 고향땅을 다시 등질 수도 없는 아버지를 바라봐야 하는 그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 p.56
“내가 최고로 인기 좋았응께”
“악극단을 따라 댕기는디 밤무대여, 밤무대란 말씨. 아가씨들하고 같이 댕기는디 서로 날 델고 잘라 캐. 째깐하고 귀여운께, 나가 누나 누나 하니께. 악극단에서 먹고 자고 그라제. 낮엔 자고 밤이믄 공연하고 노래 부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여. 오늘은 이 군, 담날은 저 군. 울로는 안 가고 밑으로만 돌았제. 매일 돌아. 여서 초청하면 열로 가고, 저서 초청하면 절로 가고. 한 달 두 달 댕긴디, 안 댕긴디가 읍써. 나는 인자 노래를 했제. 무대 나가서 독창. 그때는 마이크가 붙어 있어갖고 움직이도 못혀. 지금은 마음대로 헌디, 그땐 그리 안 했제. 멀리 떨어져도 안 되고. 지금은 맘대로 하제. 악단까지 한 스물 되제. 악단 있고 우덜은 노래 부르는 사람이고. 나는 유행가만 불렀제. 친구는 청춘가 많이 허고. 아가씨들까지 노래 부르는 사람이 일곱인가 돼. 단장 있고 나머진 극단이고. 난 매번 재창을 받아갖고 해부렸제. 내가 최고로 인기 좋았응께.” --- pp.65-66
“집사람하곤 중매 결혼했제, 순자는 연애고”
가난한 집 첫째 딸로 태어난 김순자는 살림이 너무 없어 집안에서 결혼시킬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제법 노래에 소질이 있던 아가씨는 콩쿠르에 나가 상으로 받은 냄비나 바가지를 살림에 보탰다. 규모가 작은 노래대회에서는 일등도 곧잘 했지만, 이번 대회는 제법 큰 대회여서 주변 마을에서도 ‘한가락’한다는 사람들이 많이 왔다. 옆동네 난산마을에서 노래 실력을 뽐내러 온 “째깐하고 이쁘게” 생긴 남자에게 일등을 빼앗긴 것이다. 외모와 달리 남자다운 성격의 총각이 연애를 하자는데 싫지 않았다. 아버지 몰래 거의 매일 집으로 찾아왔고, 급기야 결혼을 하기로 약속했지만 양가 어른들은 결혼을 시킬 수 없다고 했다. 혼수품이 문제였다. 아버지 말씀을 거역할 수 없었던 순자 씨는 나이 어린 부잣집 아들과 혼인했지만, 첫 남자를 잊을 수 없었다. --- p.77
“처음에 양기치가 읍썼어, 못해분다 캐, 떨려갖고”
“처음엔 양기치가 읍썼어, 못해분다 캐. 떨려갖고. 근디 난 파급이 있어분께. 한 번은 어떤 이가 나도 해볼랍니다, 카면서 가사를 적어달라 캐. 몇 번을 따라오더만 나 앞에선 쫌 혀. 그래서 이럴 땐 이케, 저럴 땐 저케 작사 작곡 하대끼 마냥 만들어야 헌다 카면서 내가 갈쳤제. 긍께로 내헌티 배운 거지. ‘선상님 선상님’ 했응께. 소리를 헌다 해서 나가 가봤제. 소리가 벌벌 떠는디, 왜 그런가 앞에 가서 봤더마 입술이 벌벌 떨려. 으메, 핑깅이도 엉뚱하게 해불고, 거가 잘못 맞추면 계꾼 발이 안 맞아부러. 그카면 어찌 되겄는가, 참말로. ‘너는 안 되겄다 했어’, 나가. 파급이 읍써, 안 돼, 했제.” --- p.101
“소릴 헐려면 소주를 묵어야 된당께”
“소리헐 때는 나가 솔찬히 합니다. 근디 한마디로 직업이 방정맞아요. 왜 그라냐면 초상나서 소리헐라면 술 한 잔 묵어야 돼. 그래야 소리가 나오지 안 나온당께. 긍께로 술 한 잔 먹어불고 소리허는 직업이란 말씨. 많이 들면 안 됩니다. 취해불면 가사를 다 이저뿐께. 이저불면 안 돼제. 딱 두 잔만 묵어, 내가. 옆에서 못 묵게 하고. 다 끝나면 상주가 한 잔 주지, 욕봤소, 카면서. 그땐 묵어도 되고. 또 자고 인나면 괜찬하니까. 자고 인나면 괜찬혀, 나가.” --- p.127
“우덜은 보는 것도 공부여, 듣는 것도 공부고”
상엿소리의 가사와 가락은 기억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온전한 전승이 불가능하다. 소리꾼의 기억과 창작 능력 그리고 순발력에 의해 달리 불리기 때문에 비슷하긴 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가사의 내용 또한 소리꾼이 망자를 대신할 경우, 소리꾼이 유가족을 대신할 경우, 그리고 오충웅 옹처럼 망자와 유가족의 입장을 아울러서 하는 경우도 있다. 이별의 슬픔을 익살스런 가사로 노래해 유가족을 위로하기도 하고, 유가족보다 더 슬퍼하면서 망자나 유가족을 위로하기도 한다. 또 망자를 위해 내세에서의 평안을 기원함으로써 망자의 가는 길을 위로하는 가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와 함께 망자의 입장에서 남은 이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이승에서의 집착과 미련을 버리고 자연의 섭리에 따라 떠나가는 모습 등을 소리하기도 한다. 유가족의 입장에서는 망자에 대한 이별의 아쉬움을 표현하는 가사로 소리를 한다. 또 상여를 멘 상두꾼의 육체적 노고에 대한 위로도 가사의 한 자락을 차지한다. --- pp.135-136
“거시기를 틀어놓고 해뿐디, 으메”
시대가 변해서 장례 절차가 간소화되고 납골당이 생겨서 상엿소리를 안 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녹음기가 그의 소리를 대신하는 건 정말이지 참을 수 없다고 했다.
“아직 나가 짱짱한디, 거 몇 푼 아낄라고, 그캐? 참말로.”
녹음기 소리와 상여꾼의 박자가 맞지 않는 건 둘째였다. 그의 소리가 한낱 기계음에 밀린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 모양이다. 삼십오 년 이상을 천직으로 알고 해왔는데 다른 소리꾼이 아니라 기계 소리에 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것 같았다. 이젠 소리를 그만 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그의 인생까지 뒤흔들었지만, 한 번 소리를 들어본 사람들이 또 찾으면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마지막 가시는 길을 부탁허는디 어찌 거절할 수 있겄는가?” --- p.166
“어디 이장이 얼굴 뻘게갖고 들어와야, 그랴”
소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먹지도 못하고 시름시름 아팠다. 동네 병원을 몇 번 갔지만 계속 큰 병원으로 가라고 할 뿐, 병명도 제대로 듣지 못한 상태였다. 상엿소리를 하니 혹 귀신이 들어선 건 아닌지 덜컥 겁이 났다. 용기를 내어 외국인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트레스성’인 것 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래가 좋고,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긴 하지만 도무지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무시까지 하니 힘이 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주위에서 이장을 해보라고 하는데 싫지 않았다. 이장이란 감투는 일일이 마을 사람들을 챙겨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그만큼 사람들은 ‘상엿소리꾼 오충웅’보다는 ‘이장 오충웅’으로 대할 것이 뻔했다. 농사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시간은 충분했고 또 누구보다 열심히 할 자신도 있었다. 간간이 상엿소리를 해서 벌이도 괜찮았으니, 주위에선 그가 이장으로 적격이라며 도무지 놔주질 않았다. 그도 싫지 않았다고 했다. --- p.172
“그냥 보면 한당께, 재주가 있어놔서”
시작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끝나는 시간은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의 꽹과리가 선두로 빙빙 돌면서 사물놀이 대형을 유지하면 모두 한참을 신명나게 놀다가 어느새 치던 악기를 내려놓고 이번에는 맨몸으로 놀이를 이어간다. 한마디로 춤판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를 따라 막춤으로 몸을 놀리는 분도 있고, 선수 뺨치게 실력 발휘를 하는 분도 있다. 그가 막춤을 추기 시작하자 젊었을 때 갈고닦은 춤 실력으로 주위의 환호와 박수를 한 몸에 받는다. 쿵짝 쿵짝,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노인대학 어르신들의 흥겨운 사물놀이 수업은 그가 그만 하자는 소리에 비로소 끝이 났다. --- p.180
“잘 안 보인께 그라지, 지금은 불편한 건 읍써”
“눈 땜시 군대를 못 갔제. 육급이여, 육급. 눈은 어려서부터 그랬제. 일본에선 괜찮했는디, 여가 나와서 그랬응께. 그때만 해도 병원이 읍썼어. 안과가 읍썼당께. 처음엔 조금 뵈다가 인자 갈수록 이것이 점점 나빠지대. 지금 병원이서는 고치지도 못 헌다 혀. 너무 오래되아버린께. 백내장이라대. 안개가 질 올라와 구름겉이로 딱 덮어부려. 잘 안 보인께 그라제. 지금은 불편한 건 읍써.”
한쪽 눈이 안 보이면 중심을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눈 쪽으로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진다. 자신이 의식하지 않으면 자연히 그리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 p.185
“나보고 빽구두 빽구두 그래부려”
“강진군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읍제. 지금도 노인핵교 댕기면서 노래자랑 나가면 등수 안에 드니께. 또 초상이 나면 각 마을에 돌아다닌께. 그라고 나보고 빽구두 빽구두 그래부려. 흰 큰 구두를 신고 댕겨부린께. 화장실 가도 빽구두, 마을회관 가도 빽구두, 초상나도 빽구두, 어디든 빽구두 맞춰서 신고 댕긴께, 그렇게 되부렸제. 그때 젊었을 때는 빽구두 신고 댕기는 사람이 나밲이 읍썼제. 이름이 났지. 안 그러겠는가? 어디 가면 인기였제. 춤 잘 추제 노래 잘허제. 그때는 강진읍에 무대 있고 노래하고 춤추는디 ‘올드’허고 ‘미드’허고 두 군데 있었는디, 지금은 카바레 같은 디 말여. 내가 째깐했어도 나가면 인자 내가 판을 쳤지. --- p.188
“혼자는 살 수가 읍써”
그의 집에 가면 그분의 흔적을 볼 수 없다.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다. 집에는 세상 떠난 아내의 젊었을 적 사진부터 결혼사진, 돌아가시기 얼마 전까지의 사진이 방 안에 걸려 있다. 지금 사귀는 분과 같이 사셨다면 아내와의 기억을 잠시 다른 곳에 보관할 법도 한데 그는 예전 그대로 세상 떠난 아내의 기억을 방 한가득 채워놓았다. 그저 지금 사귀는 분은 사진 찍히는 걸 싫어한다고 했다. 아니, 더 솔직히 다 늙어서 누군가를 사귄다는 게 “남사시럽다”고 그분이 말했단다. 또 자식들이 알면 뭐라 할지 “깝깝”해서 오충웅 옹의 존재를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전 부인의 기억이 방안을 채우고, 자신의 사진은 한 장도 없는데 도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했다. 가끔 집에 오지만 자신의 흔적을 가급적 남기지 않고 간다고 했다. 그간 오충웅 옹을 뵐 땐 주로 집에서 만났지만, 급하게 마을회관으로 장소를 옮긴 적이 몇 번 있었다. 사귀는 그분이 오시는 날이었나보다.
--- p.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