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이 지나가면 대개 두 번 쳐다본다. 어떤 사람들은 불편한 기색으로, 어떤 사람들은 동정 어린 시선으로……. 익숙지 않은 존재인 데다 우리 사회의 동등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여전히 부족한 탓이다. 그 두 번의 시선을 한 번으로 줄이고 싶었다. 대신 생각은 두 번으로 늘리고 싶었다. (…) ‘Look Twice’에서 ‘Look Once’로, ‘Think Once’에서 ‘Think Twice’로! 평창 스페셜올림픽이 이끌어 내고자 했던 변화의 목표였다. ---p.7
스페셜올림픽에서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도움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이런 구분이 무의미하다. 나눌 필요도 없고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격려를 하러 왔다가 오히려 격려를 받고 간다. 힘을 주러 왔다가 더 큰 힘을 얻고 간다. (…) 너와나의 구분 없이 우리가 되는 것, 손을 맞잡아 더 큰 세상을 만드는 것, 박수 쳐주고 등 두드려 주고 손 내밀어 주는 기쁨을 깨닫는 것, 그것이 스페셜올림픽이 우리에게 주는 실질적 가치다. ---pp.26-28
관객들은 지적 장애인들이 공연을 선보일 때마다 힘껏 박수를 치고 열렬히 환호했다. 완벽한 공연이라서가 아니었다. 서툴고 조금은 부족한 실력이지만 마음을 울리는 뜨거운 무언가가 분명히 있었다. 관객들은 그들의 무대에 깊숙이 젖어들었다. 음악을 통한 완전한 소통이었다. 완벽함보다 중요한 것, 그것은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내는 ‘조화’였다. ---p.48
어느 날 유나가 대학을 졸업하면 결혼하고 싶다는 말을 했다. 뜬금없는 소리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이런저런 걱정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 유나가 과연 남들처럼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으면서 제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이제 성인이 된 유나가 홀로 설 수 있도록 나는 옆에서 응원하고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닐까. 모순된 두 마음이 내 안에서 부딪쳤다. 그러나 언제나 같은 결론에 이른다. 유나가 행복해지려면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고. ---pp.90-91
도와준다는 것은 상대를 타자화하지만, 나눠 준다는 것은 상대와 나를 동일시하는 것이 아닐까. 가족에게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가족을 ‘도와준다’고 말하지 않는다. 식구들끼리는 서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라도 더 차지하려고 아득바득 싸우는 세상에서 나눔은 커다란 결심이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 그러나 기꺼이 내 것을 나누어 준 이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나눔은 부족함 속에서 느낄 수 있는 풍요가 아닐까. ---pp.111-112
사람들에게 지적 장애인을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나와 다른 존재라고 생각했던 지적 장애인들과 함께 가는 방법, 그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그들의 입장을 먼저 배려하는 자세, 그것은 어디서부터 출발할 수 있을까? (…) 지적 장애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 바로 ‘경청’이 그 시작이었다. 경청이라는 키워드가 나오는 순간,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어떤 울림이 느껴졌다. ---p.116
첫인상에서 시각이 차지하는 비중은 55퍼센트라고 한다. 그리고 60번 이상을 만나야 그 첫인상이 바뀐다고 한다. ‘시각’이라는 장애물을 넘어 그 사람의 본질을 보려면 60번의 만남이 필요한 것이다. 장애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 사람들은 장애인들은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다고 말한다. 개성을 찾는 데도 인색한데 아름다움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자주보고, 오래 보아 익숙해지면 하나둘 각자의 개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된다. 장애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존중도 거기서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pp.195-196
폐막식 무대에서 폐회사를 하는 순간이 왔다. 저 객석 어디에선가 유나가 나를 보고 있을 것이다. 유나가 아니었다면 듣도 보도 못한 이 대회를 알 수 있었을까? 아니, 유나가 없었다면 장애인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을까? 그 순간 가장 고마운 사람은 내 딸 유나였다.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외쳤다. ‘유나야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