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무도회. 아이러니하게도 인공적인 가면을 씀으로, 속내가 드러나지 않게 쓰고 있던 보이지 않는 가면을 벗어버려 누구보다도 솔직해지는 사람들로 가득한 날.
자신은 자연스럽게 그곳을 향해 가고 있다. 호화로운 풍경을 지나, 귀족가의 누군가라 생각하고 자신의 팔을 잡아끄는 사람들을 지나, 어디로 도달할지 분명히 알고 있는 그곳으로.
얼굴을 가린 가면의 감촉은 몹시도 딱딱하였다. 그래, 그때까지는 그래도 이렇게까지 힘들어하지는 않았다. 자신을 공식석상에서 누구라 명확히 밝힐 수 없다 해도, 그것이 앞으로 변하지 않으리라 해도 그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로 충분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불행하지 않았다. 설령, 자신을 붙들고 있는 이 모두가 그의 불행함에 눈물짓는다 할지라도. 그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저기, 보이는 곳. 가고 싶지 않아.’
그러나 바람과는 달리, 걸음은 언제나처럼 정확히 그쪽을 향한다.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시간. 그 시간. 마치, 그곳만은 몽환적인 어떤 곳처럼 하늘하늘한 휘장이 겹겹이도 치어져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걸린 반지를 보여주면, 아무것도 묻지 않고 피해주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저 여황 폐하가 비밀리에 숨기고 아끼는 애인이려니 할지도 모른다. 폐하의 마음에 들려 애쓰느라 비슷한 형태의 반지를 끼고 있는, 젊고 철없는 귀족쯤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추파의 손길이 끊이지를 않는 것을 보면 신기할 지경이었다.
떨리는 목소리.
“약속……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듣고 싶지 않다. 듣고 싶지 않지만, 걸음이 멈춰지지 않는다. 절대, 뜻대로 할 수 없다. 걸어 들어간다. 그렇게. 그렇게. 꽃과도 같이 아름다운 여인과, 자신의 누님이 있는 곳으로. 분명, 자신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그 길이 조금 일러,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되리라는 것도 분명히 안다. 그렇지만 이것을 막을 수는 없다.
“분명, 그분과 잠자리를 함께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어째서 그 사람을 풀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웃으라 하면 웃었고, 위하라 하면 위했고, 마음을 훔치라 하셔서…….”
듣고 싶지 않다.
“마음을 훔쳤습니다. 그분의 마음은 이제 오롯이 저의 것입니다. 그분은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순수하게 맹세하고 계십니다.”
양심에 몹시도 걸린다는 듯 잦아드는, 울음이 섞인 목소리. 이번에도 그녀는 운다. 막을 수 없다. 이미 일어난 일은 막을 수 없다. 과거는, 붙박이처럼 고정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저를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십니다. 그분은 어리셔도 사람을 진정 사랑하실 줄 아는 분. 이토록 자신을 속이고 있는 저를 차마 알지 못하고, 진실로 제가 그분을 사랑한다 믿어 따뜻이 품어주십니다. 결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분을 속일 수 없습니다. 저는 더 이상 그분의 마음을 기만할 수 없습니다. 그토록 아름답고 순수한 분에게 어찌 이리 잔인하게 구시는 겁니까? 명하신 일은 무엇이든지 했는데, 무엇이 더 남아 있다 말씀하십니까, 어째서…….”
숨이 넘어갈 듯, 너는 그렇게 운다. 귀가 이대로 사라지면 좋겠다. 그래서 들리지 않았으면. 그러나 자신의 발걸음은 테라스 근처에 멈추고, 언제나처럼 적은 기척으로 내색조차 하지 않고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모든 것이 기억과 똑같이 흘러가고, 언제나 그렇듯 자신은 놀란 내색조차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숨을 죽이고.
“제가 사랑하는 이를 풀어주시지 않는 겁니까? 어째서 말린 공자를 풀어주시지 않는 것입니까?”
원망과 눈물과 두려움이 뒤섞인 여인의 호소는 오래된 일인데도 자신의 가슴을 친다. 배신당한 마음보다도 우는 그녀가 못내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어진다.
“부족하지 않느냐?”
익숙한, 무미건조한 목소리. 하지만 그때의 자신은 그 목소리조차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았었다. 진심으로 믿었다. 자신의 누님은 비록 자신에게 모질게 구셔도.
“아직 그 아이의 아이를 가지지 못했지 않느냐, 너는.”
적어도 아직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다고. 자신하나 숨죽여, 되찾을 수 있다면 도와드리리라고. 다짐하고 다짐하였거늘.
“그 아이의 아이를 가지고, 낳은 아이를 나에게 안기기 전에는, 너는 네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오만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은 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제가 그분을……. 저를 이토록 아끼시는 그분을 사랑하지 않은 채, 사랑한다 거짓으로 속삭일 수 있겠습니까?”
아아. 그때 내 뺨에는 눈물이라도 한 줄기 흘렀던가? 아니면 그냥 뒤돌았던가?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 건, 아마도.
“테일레이트 님!”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비명과도 같이 울려 퍼진다. 너무 울어 목이 잠긴 네 목소리가 나를 잡는다. 내가 사랑하던 꽃 같은 이. 내 아름다운 첫사랑. 누구보다도 지켜주리라, 누구보다도 믿어주리라 다짐했던 나의 소중한 여인.
“지금 한 말은, 진심이, 진심이 아닙니다. 테일레이트 님! 테일레이트 님! 제발, 제 말을!”
헛된 바람. 헛된 믿음. 헛된 감정. 잘 짜인 연극무대의 주연 배우였을 뿐인 너. 그리고 곧이어 모든 것을 확인시켜주는 잔인하고 무미건조한 목소리.
“들었구나. 뭐,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지. 그러나 그래도 너는 저 여인을 사랑하지 않느냐?”
결국, 자신은 뒤를 돌아봤다. 보지 않으려 했지만 뒤돌아봤다.
털썩.
진심을 다해 사랑한 여인은 울며 매달리려다 자신의 싸늘한 분위기에 그저 망연한 표정을 지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녀는, 그 표정, 거짓과 슬픔과 저도 모르게 스스로 내쳐 잃어버린 신뢰에 대한 지독한 아쉬움과 스스로의 입술을 덮는 그녀의 고운 손과 흩날리던 고운 금발과, 흐려져 희미한 얼굴에 박혀 있던 청초하고 화사한 주황빛 눈동자와 이제 진실과 직면하여 모든 가면이 깨지고, 저렇게 맨얼굴로 무너져버린 사람. 사랑했던 사람
아프기 이전에 괴롭고 괴롭기 이전에 안타까워, 원망조차 묻어버리고 기억마저 깨어져 이어 붙여지지도 않는, 미련조차 바스락거리지 않는, 옛사람. 이어지는, 누이의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 당연한 사실을 읊는 것 같은 그런 목소리. 그것은 선언.
“나에게 무엇을 바랐느냐? 내가, 이 내가 너에게 이 외에 무엇을 더 허용해줄 수 있겠느냐? 나는 그저 내가 아끼는 동생의 첫사랑을.”
웃었다. 그녀는, 자신의 누이는 분명 그 순간, 기쁘게 웃었다. 기쁨을 감추려 애써 낮춘 음성 밑으로, 채 감추지 못하고 비어져 나오는 생생한 웃음소리. 그러나 비틀린 목소리가 가슴을 침에도, 자신은 원망하지 않았다.
“응원해준 것밖에 없다.”
아니, 사람의 마음을 잃어가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너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날 수 있다, 너는 믿겠지. 내가 예전처럼 되돌아갈 여지가 있으리라, 너는 믿겠지. 그래, 그러면 우리 한번 지켜보자꾸나. 누구의 마음이 더 오래 버틸지. 너일지, 나일지. 망가지는 건 누구일지. 파멸해 가는 건 누구일지. 한번 해보자꾸나.”
차가운 분노와 적개심을 담은, 질투심 하나 숨기지 않은 말 뒤로, 한 톨의 진심도 담기지 않은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사랑하는 내 동생아.”
‘그래. 이것은 꿈이로구나. 그래서 내가 이토록 바라는데도 한 발자국도 멈추지 못하고, 그때와 똑같이 그곳으로 가서 똑같이 잔인한 선고를 듣는구나. 그러나 누님, 나는 누님을 미워할 수가 없으니 그저, 나 하나만 이리 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죽이고자 하여도 죽이지 못하는, 당신의 동생으로.’
눈가를 가리는 차가운 가면이, 진심으로 고마웠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자신을 들키지 않아도 좋았으니. 한 발자국도 내딛지 못하고 침잠해가는 것은 누구? 내 누이인가, 아니면 나인가?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