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초(空超) 오상순은 한국 근대시의 선구적 개척자 중 한 사람이다. 1920년 김억, 남궁벽, 황석우, 염상섭, 김찬영 등과 함께 [폐허(廢墟)] 동인으로 참여해 7월 창간호에 [時代苦와 그 犧牲]을, 그해 11월 [개벽(開闢)] 6호에 시 [新詩]를 발표하면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10월 [폐허] 2호에 [힘의 崇拜], [힘의 憧憬], [힘의 悲哀]를 포함한 시 17편과 평론 [宗敎와 藝術]을 잇따라 발표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보성고보 영어교사로 재직하던 1923년에는 [동명(東明)] 8호에 [放浪의 마음], [虛無魂의 宣言]을 발표하고, 1924년에는 [폐허이후(廢墟以後)] 발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虛無의 祭壇], [虛無魂의 獨白] 등을 발표했다. 1926년 갑자기 작품 활동을 그만두고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입산해 불교적 선의 세계를 추구했다. 이 무렵 대구, 부산 등을 유랑하면서 이상화, 이장희, 백기만 등과 교분을 쌓았다. 공초(空超)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는 조계사(曹溪寺)에 몸을 기탁해 낮에는 연극인 이해랑이 운영하던 명동의 ‘청동다방’에 머물며 여러 문인들과 어울렸다. 이 만남을 기록한 195권의 문인 서명첩인 [청동산맥(靑銅山脈)]을 남겼다. 이 무렵 오상순은 허무를 초극하고자 무소유의 삶을 직접 실천했다. 1961년 몸을 기탁했던 조계사를 나와 안국동의 ‘정이비인후과’에서 생활하다가 고혈압성 심장병과 폐렴으로 입원해 1963년 6월 3일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은 지 20일 후에 유고 시집이자 유일한 시집인 [공초 오상순 시선]이 절친한 동료였던 구상의 도움으로 자유문화사에서 간행되었다. 1983년에는 오상순 시전집인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구상 편, 한국문학사)이, 1988년에는 추모 문집인 [시인 공초 오상순](구상 편, 자유문학사)이 간행되었다. 1992년부터 무소유의 삶을 살다 간 그를 기리기 위해 ‘공초문학상’이 제정되어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