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석사 학위와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구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 및 역서로 ≪소식사연구≫·≪당송사사≫·≪여산진면목≫·≪논어의 문법적 이해≫·≪송시선≫·≪범성대시선≫·≪팔방미인 소동파≫·≪육유시선≫·≪소동파시선≫·≪소동파사선≫·≪소동파사≫·≪당시삼백수 1, 2≫·≪정본완역 소동파시집 1, 2≫ 등이 있다.
·≪서경≫에 이르기를 “죄가 확실하지 않을 때는 가볍게 처벌하고 공이 미심쩍을 때는 후하게 포상할지니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원칙에서 좀 벗어나는 편이 나은 것이다”라고 했다. 아아! 이것은 더할 데 없이 훌륭한 말씀이다. 상을 줄 수도 있고 상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상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인자한 것이고, 벌을 줄 수도 있고 벌을 안 줄 수도 있을 때 벌을 주는 것은 지나치게 정의로운 것이다.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그것이 발전해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
·나의 글은, 만 섬이나 되는 많은 샘물이 땅을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서 마구 솟아 나와 평지에서는 막힘없이 콸콸 흘러서 하루에 천 리를 가는 것도 어렵지 않고, 굽이진 바위를 만나면 그 모양대로 구부러져 형체를 이루지만 어째서 그렇게 되는지는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알 수 있는 것은 항상 가야만 할 곳으로 가고 항상 멈추지 않을 수 없는 곳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단지 이러할 뿐이다. 그 밖의 것은 나 자신도 알 수가 없다.
·대나무가 처음 생길 때에는 한 치의 싹에 불과하나 마디와 잎이 그 속에 다 갖추어져 있다. 매미의 배나 뱀의 비늘 모양에서 칼을 열 길이나 되게 뽑아 놓은 모양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이 생기면서부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대나무를 그리는 사람들은 한 마디 한 마디 그리고 한 잎 한 잎 그려 모으니 어찌 더 이상 참다운 대나무가 존재하겠는가? 그러므로 대나무를 그릴 때는 반드시 마음속에 완성된 상태의 대나무를 구상한 다음, 붓을 잡고 오랫동안 그것을 응시하다가 그리고 싶은 부분이 보이면 얼른 일어나 붓을 휘둘러 단숨에 끝내야 한다. 자기가 본 것을 쫓기를 마치 토끼가 나타난 것을 보고 매가 덮치듯 해야지, 조금이라도 늦추면 그리려는 대상이 사라져 버린다. 여가가 나에게 이렇게 가르쳤다.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 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눈 있는 사람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이 “해의 형상은 구리 쟁반과 같소”라고 하자 쟁반을 두드려 그 소리를 들었다. 뒷날 종소리를 듣고는 그것을 해라고 생각했다. 또 어떤 사람이 “해의 빛은 초와 같소”라고 하자 초를 더듬어서 그 형상을 가늠했다. 뒷날 피리를 만져 보고는 그것을 해라고 생각했다. 해는 역시 종이나 피리와는 거리가 멀지만 눈먼 사람이 그 차이를 모르는 것은 그가 직접 본 적 없이 다른 사람에게 물어서 알려고 했기 때문이다. 도는 해보다 더 파악하기 어려우므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눈이 먼 것과 다를 리가 없다. 잘 아는 사람이 비록 절묘한 비유로 친절하게 일러 준다고 할지라도 해를 쟁반이나 초에 비유해 설명해 주는 것보다 나을 수가 없다. 쟁반에서 종으로, 초에서 피리로, 이렇게 돌려 가면서 형용한다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도를 논하는 사람 중에는 자신이 본 것에 근거해 말하는 사람도 있고 보지도 않고 억측해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모두 도를 추구하는 잘못된 방법이다. 그렇다면 도는 끝내 추구할 수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