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인 나는 한 번도 죽어보지 않았기에 무대가 곧 나의 무덤임을안다. 나의 대본은 없다 나는 나를 펼쳐보고 모방할 뿐이다 조명이 입을 다문 침묵과 어둠의 한 귀퉁이, 나의 연기는 웅크림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지 못한다 하얗고 단단한 이빨로 팝콘을 씹으며 객석에 엉덩이를 내려놓을 뿐이다 조명이 입을 열어 싯누런 무대 위에 나를 뱉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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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배우 조니 뎁의 사진을 보고 있다가 불현듯, 그가 내 멍한 눈동자를 뚫고 내 몸에 들어와, 내 입을 빌려서 하는 말이…… 살아 있는 거죠 시뻘겋게 닳아 있군요 누군가 나 아닌 다른 것들이 내 손을 빼앗아 이상한 말을 지껄여요 그때마다 가슴팍을 열고 굉장한 새떼들이 움직이는 게 들려요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누군가 나 아닌 다른 걸 빌려 입고 내가 살아 있는 것 같아요 목이 길고 몸통이 넓적한 그를 나는 그저 '너'라고만 불러요 '너'의 가느다란 혈관을 새들이 디디고 지날 적마다 그들이 죽어요 누군지 모를 내가 '너'의 혈관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풀어 숱한 새들의 날개를 뜯어먹어요 살고 싶지 않은데 누군가 나 아닌 다른 것들 때문에 내가 사는 것 같아요 정말 사는 것처럼 나도 '너'를 흉내내어 울어보죠 피투성이 다섯 손가락 끝에서 죽은 새들이 그 힘줄만으로 날아오르고 큼직한 죽음의 길 한끝으로 시커멓게 그을은 달이 떠오르고 있어요 살아서는 한번도 보지 못한 진짜 내 얼굴이 떠오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