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한 여종성이 효순이 미선이 10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한미행정협정을 개정하겠다고 말했다. 여종성은 ‘미성년자 실종방지법’, 일명 ‘돼지소녀법’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미성년자가 실종됐을 경우 최대한 많은 경찰이 동시에 투입돼서 실종자를 찾는 일을 그 어떤 업무보다도 우선한다는 것이다. 사안에 따라 작게는 인구 1만 명 기준으로 한 동이나 읍에서부터 크게는 인구 30만 명을 기준으로 한 시나 구까지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수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48시간 안에 모든 경찰이 총동원되어 실종된 아이를 찾을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겠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은 환영했고 몇몇 언론은 그동안 가만있다가 선거철이 찾아오니까 돼지소녀를 선거에 이용하는 거 아니냐고 비판했다. --- p. 124
영복은 홀로 ‘누군가’와 그 뒤에 있는 ‘그’ 또는 ‘그들’과 싸워야 했다. 외로운 싸움에 지쳐갈 즈음 희망원에서 영복을 붙잡아 갔다. ‘그들’은 송복순의 남편을 돈으로 매수해 동의서를 작성하게 했을 것이다. 영복은 모든 걸 수용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포기하고 싶었을 텐데 적절한 때가 때마침 온 것이다. 홀로 싸우고 견뎌야만 했던, 정신병원 밖으로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또는 ‘그들’이 마련해준 희망원으로 영복은 도피한 것이다. 어떤 의사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건 “출소일 없는 구속”이라고 말했다. 감옥에 있으면서 하철은 단 하루, 단 한 순간도 출소일을 손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영복은 출소를 더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서 정신병원을 나가면 다시 딸을 찾는 끔찍한 싸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정신병원으로 붙잡혀 온 김에 그 안으로 더 깊숙이 도망치고 있지 않을까. --- p. 164
“파출소장이 우습게 보여!? 난 경찰대학 나온 애송이 소장이 아니야. 밑바닥부터 올라왔다고! 니깟 놈한테 겁먹을 줄 알아?” 박덕순이 고개를 돌려 침을 뱉었다. 바람 때문에 침 부스러기가 하철의 얼굴로 튀었다. 상대를 모욕하기에 더럽게도 절묘한 방법이었다. “켕기는 게 없으면 왜 이렇게 흥분하십니까?” “기자 좋아하시네. 너 뭐하는 놈이야?” “저를 두려워하셨네요. 뒷조사를 하신 걸 보니.” 출근하던 경위가 박덕순한테 인사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그대로 파출소로 들어갔다. “아니면 소장님과 왕제명 청장 사이에 있는 누군가에게 보고를 했겠죠. 그래서 그 작자가 제 뒤를 캐고 제 자동차를 불태우고.” 박덕순이 멱살을 놓았다. “경찰 협박하는 게 니놈이 하는 일이야? 목적이 뭐야? 돈 좀 뜯으려고?” “소장님이 두려워한 건 돼지소녀 실종 때 목격자를 숨긴 사실입니까? 아니면 목격자를 숨기라고 지시한 사람들이 아직도 두려우십니까?” --- pp. 198~199
깨어 있는 시간엔 인터넷에서 돼지소녀 실종사건과 관련된 신문기사를 다시 꼼꼼히 찾아보았다. 하루 몇 번 레몬티를 마셨다. 캐나다에 어학연수를 갔던 명훈이 감기에 걸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약은 처방하지 않고 레몬티를 마시라고 했단다. 캐나다는 병원비를 내지 않는 나라다. 의사들은 약장수가 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캐나다 사람들은 건강하게 산다고 했다. 실종된 딸을 보고 싶어 난동을 부리는 아빠는 지극히 정상이다. 한국에선 그런 아빠를 직계 가족의 동의서를 위조해 9년 동안 정신병원에 가둔다. 없는 병도 만드는 이 땅에선 건강하게 살 수 없다. --- pp. 202~203
왕제명이 능선에서 “야호!”를 외쳤다. 임신한 야생동물이 ‘야호’ 때문에 낙태한다는 걸 모르지 않을 것이다. 왕제명은 산에 올라 맑은 공기를 마시며 스트레스를 풀고 가면 그만인 것이다. 돼지소녀를 납치해서 무언가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녀의 가족이 어떤 피해를 입더라도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두 아들이 잘 자라기만 한다면 가난한 집 딸인 돼지소녀 하나쯤 아무렇게나 살아도 ‘야호’를 외칠 것이다. --- p. 234
하철이 전철역 입구에 배치된 무가지를 집어 들었다. 1면 머리기사가 ‘제미니호 가족 품으로’였다. 소말리아에서 납치됐던 제미니호 선장 및 선원 네 명이 582일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공항에서 가족과 재회하며 울먹이는 선장의 얼굴이 크게 실렸다. 중년이 넘은 남자의 어린아이 같은 울음은 그 무엇도 더할 수도 뺄 수도 없는 순수함이었다. 돼지소녀는 납치된 지 3천7백 일이 넘었다. 돌아올 수 있을까. --- p. 255
“당신들한테 혜실이는 비단잉어 같은 관상용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걔 부모한테 혜실이는 전부야!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 고통…… 아예 처음부터 혜실이를 처리하고 보여주지 말던가. 당신도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암에 걸렸을 때도 차라리 바로 죽어버렸더라면. 괜히 희망을 주고 떠나는 게 얼마나 허망한지, 잘 알고 있잖아!” --- p. 289
왕제명은 송영복의 정신병원 입원 동의서를 받아오는 일을 내연녀에게 맡기고 정신 병원비를 와이프한테 맡겼다. 왕제명의 일처리 방식이다. 한 사람한테 일을 전부 맡기지 않는다. 납치를 담당한 구석현한테는 처리를 누가 했는지 모르게 하고 처리를 담당한 마두만한테는 납치를 누가 했는지 모르게 했다. 왕제명하고 박달현 정도만 알고 있으려고 했을 것이다. 일이 틀어져도 모든 그림이 드러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리라. “개새끼들은 아이큐를 정의롭게 사용하지 않는군.” --- p. 297
“양평? 혜실이가 전화를 한 게 사실이었단 말이야?” “무슨 소리야?” “송영복이 전화를 받았다 그랬어. 경찰한테 말해서 알아봤더니 발신 지역은 양평이었고.” “그럴 리가 없어.” “경찰은 왜 수사를 안 한 거지? 그 집에 전화가 있었어?” “감춰뒀는데.” “병신 새끼들!” 두만의 눈을 피해 자기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혜실이 아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잡을 수 있었단 말인가. 돼지소녀를 찾을 수 있었단 말인가. 9년 전에 경찰이 양평 발신지로 와서 수사만 했더라면. 만약 경찰이 양평으로 왔다고 해도 왕제명이 다시 덮었을까. --- pp. 299~300
“혜실이 엄마는요?” “상태가 좋아지면 내가 데려다주겠소.” “우리가 만난 적이 있어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를 타러 갔다. “봉투에 돈도 좀 있으니 그걸로…….” “당신은 몸속에 피가 흐르죠?” 영복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도 먹빛이었다. “난 혜실이를 잃고서, 피가 아니라 칼이 흐르는데…….”
‘돼지소녀’가 실종되었다. '인간극장'에서 어려운 생활에도 그 누구보다 밝은 모습을 유지하는 모습에 국민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었던 그 돼지소녀 혜실이 실종된 것이다. 화제가 되었던 만큼 온 국민과 언론의 관심을 받으며 조사가 진행됐지만 시신도 단서도 발견되지 않은 채 시간만 흘렀고, 결국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그즈음 혜실의 아빠 영복 앞에 납치범이 나타나 혜실을 보여주었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기다리면 다시 혜실을 보여주겠다고 하며 사라졌다. 그러나 영복은 철물점 주인 공형순에게 이 사실을 말하게 되고, 소문이 퍼지며 신문에도 짧게 기사가 나오게 됐다. 하지만 이미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힌 돼지소녀 실종사건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영복 홀로 혜실이 살아 있다며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지만 오히려 언론은 그 모습을 보고 죽은 자식을 부모가 보았다고 착각하는 정신병인 ‘안젤라 신드롬’이라고 진단했다. 시간이 흘러, 쓰러져 정신을 잃었던 돼지소녀 엄마인 은심이 정신을 차리고 동생 현심을 통해서 본격적으로 혜실을 찾아 나선다. 현심은 흥신소에서 사람을 찾는 것으로 유명한 하철을 찾아간다. 하철은 혜실의 주변 인물부터 시작해서 진술한 목격자들까지 꼼꼼히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에 깊이를 더할수록 오히려 혜실의 행방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마치 기계와 같은 목격자들의 진술과 영문도 모른 채 정신병원에 끌려들어간 영복. 이 사실을 전하자 당시 파출소장이 극도로 흥분하는 것을 보고 하철은 경찰이 엮여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파출소장을 넘어 영복의 병원비를 대는 사람이 강원경찰청장이라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돼지소녀 실종사건에 관련 사람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만만치 않은 세력이 배후에 있음을 감지한 하철은 두려우면서도 자신의 불우했던 과거가 혜실의 가족과 겹쳐지는 것을 느끼며 끝까지 파헤칠 것을 다짐한다. 끈질긴 조사 끝에 얻어낸 정보는 강원경찰청장 왕제명 역시 강원도지사이자 대통령 후보인 여종성의 수하라는 사실과 여종성의 아들에게 문제가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결국 하철은 왕제명의 수하이자 돼지소녀 실종사건의 핵심인물인 마두만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를 찾아간다. 두만을 찾아간 하철은 자신이 지금껏 추론한 논리로 두만을 압박하지만, 그것은 빙산의 일각일 뿐, 마두만으로부터 돼지소녀 실종사건에 얽힌 충격적인 전말을 듣게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