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번 생각이 멈춘다. 그와 동시에 걸음도 멈춘다. 왜 그러냐는 듯 아카샤가 앞선 걸음을 멈추고 가네샤를 돌아본다. 이대로 돌아가서 이사라를 어떻게 보면 좋을지 모르겠다. 잃어버린 기억을 심장에 새기고, 그리움을 찾아 헤매는 여자한테 지금 자신은 뭘 바라고 있는 걸까? 지금 이사라를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뭐야, 어디 아프냐? 설마 내가 업고 가야 하는 그런 상태는 아니겠지?”
“부축도 필요 없다. 내 발로 걸어갈 거야.”
옆에서 잔소리를 해대는 아카샤 때문에 어디 샛길로 빠지지도 못하고 집까지 씩씩하게 걸어오고 말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대문을 열고 현관으로 들어서니 문 열리는 소리를 듣고 안에서 이사라가 통통 튀어나와 가네샤를 맞는다.
“가네샤 왔…… 엄마! 어떡해! 가네샤? 가네샤 맞아요? 이게 뭐야! 어디 다쳤어요? 이 피는, 어떻게 된 거예요?”
“아…….”
방긋 미소로 다가오던 이사라의 얼굴에 창백한 비명이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어쩔 줄 몰라 한다. 안절부절못하는 태도로 가네샤의 얼굴이며 팔이며 만지고 확인한다. 그런 이사라의 모습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녀와 눈이 정면으로 딱 마주친다. 그에 시선을 회피하듯 가네샤가 고개를 돌려버린다.
‘아, 젠장. 뭔가 쓸데없는 걸 깨달은 것 같아.’
“미안, 나 좀 씻고…….”
“씻어요? 치료부터 해야 되는 거 아니고?”
물기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니 이사라가 지금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도대체 뭐라고 해줘야 하지? 아, 진짜 이게 아닌데.
“이 녀석이 다친 게 아니라 임무 중에 피를 뒤집어쓴 것뿐이니까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걱정하지 말라고 저렇게 깔끔하게 말하고 싶었던 건데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져서 말이 잘 안 나온다. 그렇다고 아카샤한테 고마운 건 절대 아니지만 아카샤 덕분에 욕실로 몸을 피할 수 있어서 다행이긴 했다. 손 닿는 대로 옷을 벗어 던져놓고 머리부터 찬물을 뒤집어쓰니 욕실 바닥이 핏물로 흥건하다. 이대로 머리를 잠식하는 잡념들도 같이 쓸려 내려가버렸으면 좋겠다.
찬물을 얼마나 오랫동안 맞아야 머리에 오른 열이 식을 수 있는 건지 인간한계에 도전 중이다. 그러나 붉게 물든 핏자국이 가시고, 역하기 그지없던 피 냄새가 가셔도 한번 자각한 감정은 잊히는 법도 없었고, 식혀지지도 않았다.
“아오, 돌겠네. 진짜…….”
며칠 전에 집을 나서기 전만 해도 이런 게 아니었는데 왜 그 잠깐 사이에 감정이 폭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변했는지 스스로도 의아했다. 혼자 끙끙 앓듯 고민해봐야 이 이상 다른 결론이 날 여지가 없다는 것도 잘 알지만 역시 이상한 건 이상한 거다. 이게 뭐야. 혼란스러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이 기분이 뭐냐고. 제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것은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빨리 정리해야지 안 되겠다.
‘그래! 정리!’
원해서 시작한 감정은 아니지만 끝을 내는 건 가네샤가 선택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여자들에게 해왔듯 그렇게 선을 긋고 끝을 고하면 그만이잖아? 아, 근데 지금 상황에서 가네샤가 이사라에게 끝내자고 말하는 건 좀 웃기겠구나. 이 경우 쌍방 합의하에 뭔가가 이뤄졌던 것이 아니니까. 그럼 자신만 정리하면 되는 거군. 그래, 차라리 이편이 깔끔하지.
그렇게 하자고 마음과 생각의 정리를 마치고 타월을 두른 채 욕실 문을 연다.
“어?”
“…….”
그리고 바로 문 앞에서 노크하려는 자세로 서 있는 이사라와 마주친다.
“너무 안 나와서요. 혹시 쓰러진 건가 걱정돼서 와봤어요. 괜찮아요?”
“그래서 들어올 참이었어?”
“그건 아니고, 노크해서 대답이 없으면 아카샤한테 살펴보라고 말하려던 참이었어요. 근데 그렇게 하기 전에 문 열고 나와서 다행이에요.”
머리카락을 타고 찬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보던 이사라가 타월을 가지고 나와 그의 머리 위에 펼쳐 부드럽게 닦아낸다. 그 행동 하나가 오랫동안 욕실에서 한 고민을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린다.
‘신이시여, 왜 자꾸 사람을 시험합니까! 왜 내 마음대로 정리도 못하게 만들어!’
다시금 되살아나는 마음에 머리가 아찔해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자 이사라가 옆에서 그런 그를 부축하려는 듯 붙잡는다. 그 손길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가볍게 뿌리치고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거실 쪽으로 나오니 아카샤와 언제 왔는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페트라가 눈에 들어온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보러 온 양 나타난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며 가네샤가 아카샤의 옆자리에 파묻히듯 주저앉는다. 수건으로 머리부터 얼굴까지 전부 뒤집어쓴 채 얌전히 있자 페트라의 호기심이 제일 먼저 가네샤에게 직격한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설명해봐. 황궁이 난리가 났기에 들어가봤더니 인신매매단 하나를 아예 작살냈다고 하잖아. 아카샤가 안 보여서 단장님께 여쭈었더니 너 때문에 돌아갔다지 뭐야. 내가 얼마나 깜짝 놀랐던지……. 그래서 뭘, 어떻게 한 거야?”
“잘 아네. 인신매매단을 잡았어. 그게 다야.”
성의 없는 가네샤의 대답이 성에 차지 않는지 좀 더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게 다가 아닌데? 들리는 소리론 너 오늘 엄청났다고…….”
“야! 그냥 나가서 물어봐. 난 더 해줄 말 없거든?”
“이게 걱정돼서 와줬더니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지?”
가네샤가 아니라 아카샤가 걱정이 돼서 온 거면서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 겸사겸사 찾아와서 육천 마디의 호기심을 던져놓고 시작하는 몹쓸 여자가 누군데 지금 누구한테 버르장머리를 논해?!
“정말 걱정이 되면 좀 돌아가주면 안 되겠어? 내가 지금 배도 고프고, 졸리고, 피곤하고, 힘들고…… 아무튼 당장 느낄 수 있는 모든 인고(忍苦)가 뼈 마디마디까지 박혀 있는 상태라고.”
“어머, 그랬어? 그럼 내가 밥…….”
“내가 미쳤냐? 네가 해주는 밥을 먹게?”
눈앞에 있는 크리스털로 된 잔을 가네샤에게 집어 던지려는 페트라를 막는 이사라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만에 하나 페트라가 던지려던 잔에 이사라가 맞기라도 했으면 어쩔 뻔했나. 유혈사태로까지 번지기 전에 아카샤가 나서서 페트라를 데리고 나갔으니 망정이지 오늘 두 번째 칼부림이 제집에서 날 뻔했다.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나니 집 안이 조용하다. 그것이 반가우면서도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한다. 괜히 돌려보냈나?
“저녁 차릴까요?”
“아니야, 사실 생각 없어.”
“그래도 조금 먹어요.”
“그럼 먹을 수 있는 걸로 만들어봐.”
“알았어요. 조금만 기다려요!”
이사라가 요리하는 건 본 적도 없고, 시킨 적도 없다. 그런데 대뜸 저녁을 차리겠다고 말하고 기다리라는 걸 보니 그래도 할 수 있는 요리가 있긴 한가 보다. 이사라가 저녁을 차리는 동안 가운 대신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제법 물기가 가신 머리를 정리한다.
이대로 딱 자버렸으면 좋겠는데 여기서 잠들면 이사라가 깨우러 제 방까지 들어올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혼자 고민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이 이사라의 목소리가 들려와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의외의 식탁에 깜짝 놀란다.
“모양새가 제법 그럴듯하다?”
“맛도 제법이거든요?”
그 말마따나 차려놓은 음식들이 하나같이 제 입에 맞았다. 다른 사람이 차려준 음식은 독립 전에 어머니가 해준 것과 페트라의 고문 같은 것이 전부라서 그런지 쓸데없이 풍성해진 감성이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입에 맞아요?”
“응.”
“진짜 초딩 입맛인 것 같아.”
“무슨 입맛?”
괴상한 단어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건 욕 같은데?
“좀 자극적인 거, 그런 거 좋아하잖아요. 나까지 다 물들여놨어.”
“내가 언제?”
“나한테 맨날 이런 음식만 해줬잖아요. 그걸 난 다 먹었지. 살찌는 데 좋은 음식인 것도 모르고. 가네샤는 활동량이 많으니까 괜찮지만…… 아니, 오늘 같은 일은 전혀 괜찮지 않지만! 아까 심장이 멎는 줄 알았잖아요. 사흘 만에 나타난 사람이 머리부터 피를 뚝뚝 흘리고 문 앞에 서 있어서 많이 다친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알아요? 아, 아직도 손발이 떨리네.”
이사라의 목소리에 떨림이 묻어난다. 그에 마음 한켠이 욱신거린다.
‘악! 이거 싫어! 다친 것도 아닌데 왜 욱신거리는 거야!’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감각에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일부러 말을 돌린다.
“그냥 사고가 좀 있었어.”
그래, 사고다.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그런 사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그것보다 사흘 동안 뭐 했어?”
“사흘 동안? 아, 이것저것 좀 찾아봤어요. 무스타파 빈 우르크라는 초대 앗셀 황제부터 차츰차츰 범위를 넓히는 식으로.”
“그래서 성과는 있고?”
그 말에 이사라가 고개를 끄덕인다.
“무스타파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마다 나오는 이름 하나하나를 보면서 내가 찾고 있는 게 뭔지 어렴풋이 감이 잡혔어요. 난 그 황제의 이름을 통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거예요.”
그 말은 찾고 있는 게 사람이란 뜻이었다.
“아주 소중하고 그리운 사람. 내가 기억을 다 잃어버려도 좋을 만큼 좋아한 사람. 아마 난 사랑하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 같아요.”
“…….”
‘망할 놈의 신 같으니라고. 기어이 이 소리를 듣게 하려고 아까 마음도 정리하지 못하게 한 거냐! 내가 왜! 고백도 못한 상황에서 차이는 것부터 해야 하는데?’
신이 눈앞에 있다면 멱살을 잡고 주먹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