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대구교도소에 이감된 후 1972년 여름께 갑자기 오른쪽 몸이 마비가 되고 입이 움직이지 않아 말을 할 수도 없었다. 감각은 있는데 움직이지 못하고 그 부위에 무엇이 닿으면 살을 찢는 통증이 따랐다. 처음엔 '잘됐다. 죽음보다 못하게 사는니 이대로 죽는 게 낫다. 차라리 죽자.'하는 생각으로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수 박사(좌익수로 무기징역형을 살던 의학박사)의 설득과 정성어린 간호로 한 달 만에 말문이 트이고 석달 후에 몸이 차츰 회복되었다.
1974년, 전향공작 전담반이 자행한 테러는 내게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신뢰감마저 잃게 했다. 나는 감옥 안의 감옥에 갇혀 몸의 구속에 이어 영혼마저 구속하는 테러에 맞서 싸워야 했다. 1977년에 나는 다시 대전교도소로 이감갔다. 비전향 장기수들을 위해 마련한 특별사동(일병 모스큽)에 입방했다. 그리고 독방으로 들어갔다. 똑바로 누우면 머리와 발가락이 각각 벽에 맞닿을 만큼 좁은 공간이었다. 식기구와 사물들을 놓으면 몸을 추스리기가 불편했다. 키가 큰 사람은 늘 몸을 쭈그리고 자야 했다.
감옥살이조차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암담함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양심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나는 여기에서 감옥안의 수많은 폭력과 혹독한 고통은 일일이 말하지 않겠다. 다만 잔인한 세월을 3,40년 이상 이기고 오늘 당당히 서계신 선생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