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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샤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개정판) 3
eBook

엘샤 꽃나무 아래에 앉아서(개정판) 3

[ EPU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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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2014년 08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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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4.2만자, 약 4.6만 단어, A4 약 89쪽?
ISBN13 979115682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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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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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흡!”
봉인 때문에 저택으로 몰래 지스를 데리고 온 크란로드 하젠 경은 곰 인형을 업은 테인 경, 아니 테디를 보고 웃었다. 차마 대놓고 크게 웃지는 못해 입을 틀어막은 채로 고개를 돌린 그를 보고 아이의 모습을 한 그는 툭하니 말을 내뱉었다.
“크게 웃으셔도 됩니다. 황태자 전하도 실컷 웃고 가셨으니까요.”
“푸하하하핫! 크흐흡! 그, 곰 인형은 뭡니까, 도대체! 잘 어울리긴 합니다만. 푸핫!”
“엘리시아 님이 안겨주신 겁니다. 이게 더 아이처럼 보일 거라면서.”
살짝 불퉁한 표정을 한 그를 본 하젠 경은 겨우 웃음을 그치면서 작은 테디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실제로도 하젠 경의 나이가 그보다 훨씬 위이므로 한숨을 쉬면서도 그는 그냥 계속 머리가 흐트러지도록 내버려두었다.
“좋은 위장이군요, 엘시 님. 솔직히 저런 모습이면 아무도 그의 본 정체를 눈치 채지 못할 겁니다. 기왕이면 곰 안에 무기 같은 걸 넣어도 편하겠고요.”
“안 그래도 배 쪽을 뜯어서 지퍼를 달았어요. 단검 두 개랑 작은 무기를 넣었으니까 위험한 일이 생겨도 저항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예요.”
칭찬하는 말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아져 웃으면서 대답하자 그는 흐뭇한 표정으로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젠 경은 공국에 있는 크란로드 중에서도 그 실력이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기사로 예전에 내가 공국에서 제국으로 올 때 호위를 맡았었다.
크란로드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가주는 왕의 옆에, 다른 실력자들은 왕실의 피가 강한 자의 호위를 맡는다. 나는 직계였기 때문에 피의 힘이 강해서 공국에 있을 때는 상당히 많은 수의 크란로드를 맡았었다. 그건 공국에서 제국으로 올 때도 변하지 않아서 지스가 태어난 뒤 옆에 있던 기사들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여섯 명 정도의 크란로드와 같이 행동했다. 내가 문서상으로 죽음을 맞기 몇 주 전까지.
죽기 전에 기사들은 전부 공국으로 돌려보냈었는데 그도 그때 돌아간 기사 중 한 명이었다. 내가 죽어버리면 기사들의 힘이 폭주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전부 돌려보냈었다.
“저, 이제 슬슬 봉인을 시작해야 되지 않습니까? 몰래 나온 거라 그리 오래 황궁을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웃는 하젠 경을 경악한 표정으로 쳐다보던 루디타 경은 편하게 앉아버린 지스와 하젠 경을 재촉했다.
“루디타 경, 그쪽에서 알아서 잘할 거야. 어차피 스크롤을 가지고 왔으니 언제 돌아가든지 상관없지 않나?”
“왕자님, 엘윈 자작님이 꼬옥 일찍 돌아오셔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신 건 잊어버리신 겁니까? 요즘 일이 많아지셔서 홀쭉해지셨다고요.”
“고모님이 이번에 한 고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외숙부는 엄살이 너무 심하셔.”
아무래도 이번에 온 기사들 중 막내인지 루디타 경은 한숨을 쉬며 간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안심한 표정으로 바르게 섰다.
“지스, 너무 오래 황궁을 비워두는 건 좋지 않아. 게다가 임시 봉인도 불안하니 얼른 제대로 된 봉인을 하렴.”
“네, 고모님.”
그러자 활짝 웃는 얼굴로 지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에서 일어나 이제는 자신과 키가 비슷해진 테인 경에게로 갔다.
“솔직히 말하면 난 그대가 정말 마음에 들지 않아.”
“왕자님의 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벌이 너무 약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미 그대는 꽤나 복잡한 인생을 살았다고 들었으니. 여신의 기준과 우리의 기준은 다르다고 들었다. 우리가 단순히 현실의 사건만을 본다면 여신은 그 사람의 인생 전부를 보고 벌을 정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납득하기로 했다. 하지만 납득한 거지 그대를 용서했다는 건 아니야. 난 어려서 아직 고모님처럼 넓은 마음을 가지지 못했거든. 그러니까 봉인은 좀 아플 거다.”
얼굴을 굳힌 지스는 품에서 작은 상자 두 개를 꺼내었다. 그리고는 상자를 열어 작은 은색의 팔찌를 꺼냈다.
“이건 크란로드의 힘을 봉인하는 팔찌다. 원래는 마나로 새겨진 숨겨져 있는 마법진과 연동해서 힘을 적당히 억누르는 작용을 하지만 그대는 마법진이 없으니 최대한으로 힘을 억누르도록 설계된 걸 가지고 왔어. 팔찌로는 부족하니 귀걸이도 해야 한다. 부작용이 있어서 한 사흘 정도는 감기에 걸린 것처럼 몸이 무거울 거야.”
그리고는 내키지 않는 표정이 역력한 채로 손가락에 살짝 피를 낸 다음 팔찌의 봉인진을 작동시켜 재빠르게 작은 팔에다가 채웠다.
“윽!”
반동이 심한지 테인 경, 아니 테디는 주저앉아버렸다.
“센 거라서 좀 힘들 겁니다. 하지만 계속하고 있으면 금방 적응되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진지한 표정을 한 루디타 경의 말을 듣고 그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색이 좀 나아지자 지스는 붉은색의 보석이 박힌 귀걸이를 꺼내더니 그의 귀에 끼워 넣었다.
“깨거나 잃어버리지 말도록. 이 귀걸이는 아버님의 피가 담겨 있다. 어려졌다 해도 이미 피가 한번 깨어난 이상 그리 안전하지는 않거든.”
반짝거리는 귀걸이에서 오라버니의 마음이 느껴졌다. 틀림없이 나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직접 저 귀걸이를 만들어 보냈을 것이다. 내가 안전하고 편안하게 살길 바라면서. 문제투성이 동생인데도 이렇게 사랑해주시니……. 이래서 내가 삶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약속을 지켜라. 의지에 따르라.”
차분하게 지스가 마지막 시동어를 말하자 귀걸이에서 붉은빛의 마나가 흘러나와 그의 몸을 감쌌다. 많이 고통스러운지 이를 꽉 문 그가 양탄자 위로 털썩 쓰러졌다.
“역시 진이 없으니 고통이 심하군요, 흐음.”
“다리를 다치신 고모님의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어쨌거나 업무 끝!”
손을 탁탁 털어버린 지스가 후다닥 내 앞으로 달려와 내 목을 끌어안았다.
“헤헤, 고모님, 저 잘했죠?”
“지스, 일부러 아프게 한 건 아니지?”
살랑거리는 은발을 쓰다듬어주며 물어보자 약간 찔린 표정으로 지스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
“아니에요. 마법진이 없으니까 마나가 한꺼번에 움직여서 생기는 부작용인 거 고모님도 아시잖아요.”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래도 봉인을 하는 왕족이 강하게 소망하면 어느 정도는 고통을 줄여줄 수 있다. 하지만 지스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으휴, 그는 나중에 틀림없이 공국에서 일하게 될 텐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하지만 아직 열한 살인 지스에게 이런 생각까지 하게 하는 건 무리인 걸 아는지라 난 그저 칭찬해달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조카를 쓰다듬어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스는 나이에 비해서 아주 뛰어나게 잘 대처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혼자뿐이니 앞으로 더 많은 짐을 져야 할 것이었다. 벌써부터 너무 큰 부담을 주긴 싫었다.
“고모님, 여긴 지내기 괜찮으세요?”
“응. 너무 편해서 밖에서 걱정하는 슈리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야. 이것저것 일을 처리한다고 바쁜 그 아이를 요즘 거의 만나지 못했거든.”
“어쩔 수 없죠. 고모님의 부재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여러 가지 알리바이를 만든다고 뛰어다녀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얼굴이 비슷하다 보니 사람들이 생각보다 쉽게 착각해서 그나마 일이 쉬웠어요. 고모님처럼 변장을 하고 여기저기 다녔으니까 제마 왕국의 마탑에서 재판 증인인 영애와 고모님이 동일 인물이라는 걸 알지 못한 거예요.”
“프리지아 선생님께 들었어. 머리도 길게 기르고 드레스도 입었다고 해서 궁금했는데 촬영한 구슬이 하나도 없다고 하더라고.”
그러자 루디타 경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게 화난 슈페리안 군이 전부 다 부숴버렸거든요. 몰래 숨겨둔 것까지 귀신처럼 찾아내서 산산조각 냈답니다.”
어떤 모습으로 그랬을지 상상이 가는지라 아쉽지만 포기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면 듣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
“고모님, 나중에 이 일이 끝나면 공국에 한 번 오시지 않겠어요? 아버님도 어머님도 고모님을 보고 싶어 하시는데. 엘루비도 아주 귀여워요. 후작 부인이 아기를 또 가지셨으니까 내년이면 태어날 거예요. 모두 다 틀림없이 고모님을 좋아할 거예요.”
내 옷자락을 꼭 붙잡은 지스가 간절하게 나에게 물었다. 여행이라……. 가려고야 한다면 못 갈 건 없지만 이 모습으로 가는 건 무리다. 머리도 염색하고 눈의 색도 마법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허락도 받아야 하고.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정도는 고향에 가볼 생각이었던지라 나는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었다.
“그래. 좀 오래 기다려야 하겠지만 꼭 갈 테니까. 하지만 지스, 이것 하나는 명심하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자기에게 오라고 하면 안 된단다.”
“그러면요?”
“네가 직접 그 사람에게 가야 해. 쫓고 또 쫓아서 계속 등만 보이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가렴. 그리고 그 사람이 뒤를 돌아보면 그때 크게 말하는 거야. 솔직한 마음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겼을 때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시죠?”
“그래. 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없단다. 사랑도 국민들의 존경도 국가의 안정도 전부 열심히 노력하고 쫓아야만 얻을 수 있는 거야.”
“네, 고모님.”
내 말뜻을 이해한 아이가 웃으면서 수긍의 대답을 했다. 일부러 말하지 않아도 어렴풋하게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번 일로 많이 배웠을 테니까.
“엘시 님, 크란로드의 일로 귀국이 좀 당겨졌습니다. 내일 모레 마법진으로 바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피를 이어받았다고 추정되는 테인 경의 여동생들도 함께 갑니다.”
하젠 경의 말이 끝나자마자 지스가 풀이 죽은 얼굴이 되었다.
“좀 더 있고 싶었는데 죄송해요, 고모님. 하지만 이번에 테인 경의 여동생들을 전부 공국으로 데리고 가서 한동안은 철저하게 검사하고 관리할 거니까 고모님은 안심하셔도 괜찮아요. 원래 여성은 피의 각성이 드문 편이고 이제까지 아무 일이 없었으니, 검사한다 해도 크란로드일 가능성은 낮을 겁니다. 다만, 새로 태어난 아기가 남자아이라 걱정이긴 하지만요.”
“얼마나 가르쳐주었니?”
“아직까지는 크란로드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어요. 다만 테인 경이 제국에서 죄인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새겨진 이상 여동생들이 수도에서 살기엔 녹록치 않으니까 한동안 공국으로 피신해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이유를 붙였죠. 또 조사 결과, 그들이 공국의 귀족가의 후손일지도 모른다는 말만 해놓았어요.”
일의 처리 솜씨가 몹시 깔끔하다. 아마도 엘윈 자작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뛰어다닌 결과일 것이다. 어린아이인 지스가 말해선 믿음이 가지 않았을 테니 여동생들의 설득과 이주에 필요한 모든 서류처리를 그가 대신 했을 것이었다. 원래 이렇게 일을 많이 하려고 온 길이 아니었을 텐데 나 때문에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미안해졌다.
“자작님이 무척 고생이시구나.”
“외숙부는 입으로는 우는 소리를 내면서도 눈은 생기가 도시던데요? 평소에 하시는 거에 비하면 이 정도쯤은 한 입 거리도 안 되죠.”
“그건 그렇지만 지스, 자작님께 죄송하다고 전해드리렴. 그리고 고맙다는 인사도.”
“네, 고모님. 더 부탁할 말은 없으세요?”
“음, 판을 새로 짜야 할 필요가 있으니 한동안은 야근을 하셔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씀드리렴. 아마 내가 말하지 않아도 알고 계시겠지만.”
제마 왕국은 공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국가인지라 이번 일로 인해서 아마도 외교에 약간의 변화가 생길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중재자의 입장에서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미리 대비해 둬서 나쁠 것은 없었다. 좋든 싫든 지스가 어느 정도 사건을 해결하는 데 개입했으니까 말이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시계를 본 루디타 경이 그만 가야 할 시간이라고 지스를 재촉했다. 아쉬운 얼굴로 일어난 아이는 내 볼에 입을 맞추면서 날 꼭 안았다.
“고모님, 다시 볼 때까지 건강하셔야 해요. 다치지도 마시고요.”
“그래, 지스. 조심해서 돌아가렴. 어디에 있든 언제나 널 사랑한단다, 아가야.”
아이의 양쪽 볼에 작별의 인사를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 작고 토실토실하던 아이가 벌써 이만큼 컸다. 몇 년이 지나면 이제는 어른이 된 모습으로 늠름하게 공국을 다스릴 것이다. 다시 만나는 건 꽤나 훗날의 일이겠지만 그래도 바람결에 실려 소식은 계속 내 귀에 전해질 테니 웃으며 보낼 수 있다.

◇ ◆ ◇

헤어지기가 아쉬웠지만 정말 시간이 아슬아슬한지라 지스는 한숨을 쉬며 방 밖으로 나왔다. 그들이 저택에 도착함과 동시에 황궁에 밀린 기사단 업무를 하러 갔던 라인트가 돌아와 마법진이 그려진 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잘 부탁합니다. 라인트 경.”
혹시나 듣는 귀가 있을지 몰라 지스는 아주 짤막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절절한 심정을 표현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소중한 고모님을 제국에 두고 싶지 않았다. 공국에 데려가 왕족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목숨을 바칠 수 있는 크란로드가 가득한 아벤타 본가에 두고 싶었다. 피가 왕족을 보호하도록 움직이는 그들에게 고모님을 맡긴다면 그녀는 절대적으로 안전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검과 기사의 명예를 걸고 약속드리지요.”
라인트의 말에 조금 마음이 놓이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꼬맹이가 되어버린 테인이야 별로 상관이 없었지만 일단 예전 친구라곤 해도 언제 눈이 휙 돌아가 고모님을 덮칠지 알게 뭔가. 자신이 생각하기엔 지극히 가족다운 걱정을, 남이 보기에는 그냥 쓸데없는 걱정을 하면서 지스는 라인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라인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에게 귓속말로 작게 속삭였다.
“다시 잃어버리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한 지스는 그에게 귓속말로 어제 아버지가 했던 말을 짧게 줄여서 전해주었다.
“같은 방에 있는 건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을 때만. 접촉해야 할 시에는 무조건 본인의 동의를 구하고 나서. 이를 어길 시에는 아무리 친구의 조카라도 몽둥이로 얻어맞을 각오는 해야 할 것.”
“음?”
“아버님의 전언입니다.”
생긋 웃은 지스가 당황한 라인트의 얼굴을 보고 잽싸게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황궁에서 소환하는 마나에 의해 반짝, 빛을 뿌리며 사라졌다.
“내가 목욕탕에 뛰어 들어갔다는 것이 알려지면 맞아 죽을지도……. 혹시라도 공왕이 제국에 방문하시면 디에노안 영지로 도망이라도 가야겠군.”
제국과는 미묘하게 다른 공국의 관습을 떠올린 라인트는 곧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공국은 같은 성별끼리 하는 친애의 행동에는 아주 너그러웠지만 다른 성별일 경우에는 굉장히 엄격했다. 열두 살 이상의 여자아이들을 대할 때는 손을 잡는 것조차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어 물어봐야 할 정도였다.
물론 여자 쪽에서 허락하면 상관없다. 하지만 동의를 구하지 않고 했을 경우에는 심하면 감옥에서 몇 달을 살아야 할 정도로 중죄인 취급을 했다.
‘잊어버렸다는 변명은…… 안 통하겠지. 엘시를 믿을 수밖에.’
상냥한 친구가 설마 자신이 오라버니에게 두들겨 맞는 걸 지켜보고만 있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며 라인트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어쨌거나 지금은 옆에 자신이 있어야 했다.
--- 본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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