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의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한이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을 동원한 데는 외세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국내 치안유지 수준으로만 한국군을 지원한 미국과 달리, 소련은 무기를 포함한 각종 전쟁물자를 지원하고 작전에 관여했다. 중국 역시 조선족으로 구성된 팔로군 사단을 북한군에 편입시키는 등 지원했다. 중무장한 북한군과 달리 남한의 국군은 장비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침략 준비를 철저히 한 북한군에 의해 아군은 개전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기는 등 굴욕을 겪었다.
유엔군 참전, 반격, 북진 북한이 남침 계획을 세울 때 고려한 가장 중요한 변수는 미국의 참전 여부였다. 남침 세부안을 작성하는데 커다란 힘을 행사한 소련은 설령 미국의 대응이 있더라도 군사적인 개입은 상당히 늦을 것이라 판단했고, 그 사이에 한반도 전체를 군사적으로 점령하면 된다고 낙관했다. 미국이 태평양방위선에서 한국과 타이완을 제외한 것도 이러한 판단을 한 이유였다. 하지만 미국은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의 결단하에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즉각 참전했다. 또한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통해 사상 최초로 유엔군사령부가 설치되고,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원수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국제사회의 신속한 대처는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참전이 바로 전세를 뒤엎지는 못했다. 서둘러 전장에 투입된 미군은 북한군을 얕잡아보다 패배를 당했다. 아군은 계속해서 후퇴하다 낙동강방어선을 최후의 교두보로 삼고 혈전을 치른다. 사령관 맥아더는 전장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세기의 도박에 가까운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한다. 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아군은 전선을 밀고 올라가 서울을 탈환하고 급기야는 38선을 넘어 북진하게 된다. 그러나 아군 부대가 압록강에 도달해 강물을 수통에 담는 감격스러운 순간, 전쟁은 새로운 양상으로 바뀌게 된다.
중공군 참전 한만국경에 도달한 아군은 전선 전체에 걸쳐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중공군과 마주쳤다. 중공군의 참전은 아군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런 사건이었지만 결코 우발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미 중국은 북한의 최대 공세기인 1950년 7월부터 8월 중순 사이 18개 사(師) 약 25만 명으로 구성된 동북변방군(東北邊方軍)을 만주 일대에 배치해두었다. 이는 만약을 대비한 사전조치였지만 아군의 38선 돌파가 가시화되고 북한이 참전을 요청하자 중국의 태도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결국 마오쩌둥(毛澤東)은 참전을 결정했고 아군은 중공군에 밀려 남쪽으로 후퇴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기점으로 시작한 아군의 반격과 북진은 정확히 석 달 후인 12월 15일 아군이 38선 일대에 정렬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전쟁은 발발 이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휴전 전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공세와 반격을 주고받던 아군과 공산군은 다시 한 번 38선 부근에 전선을 형성했다. 또 다시 전쟁 전 상태로 회귀한 것이다. 아군이 다시 주도권을 장악한 1951년 3월 이후에는 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어디까지 진격할 것인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국 정부는 다시 한 번 북진통일을 주장했지만 이미 주변에서는 전쟁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었다. 미국은 정치적으로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적당한 선에서 휴전이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위해 적이 협상에 응해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한편 중공군도 6차 공세가 대참패로 끝나면서 재래식 장비와 군수지원체제로는 결코 유엔군에게 치명타를 안길 수 없음을 뚜렷이 인식했다. 이제 중공군이 택할 수 있는 정책 또한 유엔군이 원하는 것처럼 적당한 선에서 체면에 손상을 입지 않고 전쟁을 중지하는 것이었다. 묘하게도 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맞아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휴전이 가시화되었다. 이후의 전쟁은 휴전회담 진행과정에 발맞추어 진행하는 기묘한 모습으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