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궁은 넓습니다.
폐하가 기거하시는 중앙궁만 하더라도 웬 박물관 같아요. 어떤 점이 박물관 같은가 하면, 무엇 하나 쉽게 건드리면 잡혀간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매주 콧수염 모양을 바꾸는 시종장님의 자랑에 따르면 다섯 살짜리가 대충 붓을 후려갈긴 것 같은 저 그림 한 점 가격이 제 평생 월급과 맞먹는대요. 아, 이제 저도 꽤 두둑한 월급을 받게 되었으니 20년 정도로 해둘까요.
저는 뽀얀 훈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들고 이건 얼마나 할까 잠시 고민해보았습니다.
“들게. 호르차 지방의 조르나조흔 차라네. 독특한 향과 깊고 깔끔한 끝 맛이 아주 우수한 찻잎이지. 황궁 조리사로 일할 정도이니 차에도 어느 정도 조예가 있겠지.”
쭉 찢어진 눈매가 기대감으로 빛납니다. 저는 뜨거운 찻물을 후룩 마시고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내려놓았습니다. 맛없어…….
“찻잔을 내려놓을 때는 새끼손가락을 짚어주어 소리가 나지 않게 해야 하네.”
“아, 예…….”
여긴 다도 교실입니까? 저는 다시 조심조심 찻잔을 내려놓았습니다.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진한 만족감이 흐릅니다. 저는 차에 조예 같은 거 없어요. 밍밍한 찻물보다 진한 코코아나 달달한 쿠키를 더 좋아한다고요. 그러나 지금 이 남자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가는 뺨 후려치기를 당할 것 같습니다. 저는 더 맞기 싫어요. 아프기 싫습니다.
“저, 그런데 무슨 일로?”
“좋은 제안이 하나 있네. 자네에게도 결코 나쁘지 않은 일일 거야.”
남자의 쪽 찢어진 눈매가 야비하게 빛났습니다. 남자는 시종장님도 울고 가실 만큼 깔끔하게 다듬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몸을 앞으로 숙이셨습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 양 얼굴에는 긴장감마저 흐릅니다. 은근히 눈짓을 하시는 것이, 제게도 분위기를 맞춰달라는 것 같아요. 저는 영 내키지 않았지만 우선 의자를 조금 당겨 허리를 숙였습니다. 목소리를 낮춰 속닥거리는 게, 꼭 제 비밀을 이야기하는 열댓 살 소녀 같네요.
“그리 어렵지 않다네…….”
“그런데 누구세요?”
정체부터 밝히세요, 소녀 취향 아저씨.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습니다. 남자는 다시 허리를 곧게 펴고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십니다. 그리고 진지한 얼굴로 자기 소개를 합니다.
“그러고 보니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비츠나리 후작 가문의 장, 매즈히스트 마조히즘이라고 하네.”
“…….”
저는 자랑스레 ‘나는 변태다’라고 말하는 남자를 잠시 바라보았습니다. 심지어 모근이 약해 보이는 가문이에요. 이 제국은 이상해요. 이상해도 너무 이상해요.
저는 남자의 소개에 맞추어 찻잔 옆에 놓인 티스푼을 남자의 얼굴을 향해 던졌습니다. 남자가 악! 비명을 지르며 파르르 떨어요. 어? 안 좋아하네?
“이게 뭐 하는 짓인가!”
“마조히스트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나는! 정상이야! 마조히스트가 아니라 매즈히스트라고!”
조금만 더 놔두면 얼굴이 폭발할 것 같아요.
“죄, 죄송합니다.”
“……흠! 아닐세. 앞으로 우리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 자네라면 이 정도쯤이야…… 큼.”
남자는 다시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 눈짓을 합니다. 제가 그에 맞춰 상체를 숙이자 목소리를 낮추고 속닥거렸습니다. 얼굴은 아저씨인데 하는 짓은 영락없는 소녀입니다.
“이건 자네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자네도 제국의 앞날이 걱정스럽지 않은가? 자네는 제국의 영원한 영웅이 될 수 있다네. 자네의 앞날도 더욱 찬란하게 빛이 날 거야.”
매즈히스트 후작이 소곤거립니다. 하지만 저는 영웅이고 빛나는 앞날이고 관심이 없어요. 제국? 망하거나 말거나 무슨 상관이랍니까. 윗대가리들이 모두 바뀌어도 주방식구들까지 바뀌지는 않습니다. 내가는 음식을 먹을 입이 어느 것이 되었든, 우리는 우리의 할 일만 하면 그만이니까요. 없어지면 다른 일자리 찾으면 됩니다. 그리고 내 앞날…… 거기까지 생각이 이르자 저는 인상을 찡그렸습니다.
이대로는 살 수 없습니다. 실험, 그까짓 거 어울려주어서 내 일자리, 공무원 자리를 지킬 수 있다면 그 정도는 괜찮아요. 뭐 어때요? 아픈 것도 아니고, 내게는 손해 날 것 하나 없습니다. 월급도 더 빵빵해지고, 일도 편해졌어요. 특근이나 야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폐하의 화살막이가 되는 거, 이건 아니에요. 아프다고요! 싫다고요! 저는 이렇게까지 공무원 자리를 지켜야 하나 생각해보았습니다.
결론은 아니다, 예요. 공무원보다 삶의 질이 우선이에요! 저는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전생의 한을 풀기 위해 공무원이 되었고, 또 그 자리를 지키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는 그리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좋아요.”
“이 약을 폐하의, 뭐?”
“하겠습니다, 그 일. 대신 대가는 확실히 지불하셔야 해요.”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해주자 매즈히스트 후작이 진하게 웃습니다. 얄상한 입술이 길게 늘어나며 호선을 그려요.
“자네는 복 받을 걸세. 그리고 대가일세, 댓가가 아니라. 발음에 주의하게.”
“…….”
긴장이 풀렸는지 재잘재잘 잔소리를 늘어놓는 후작을 보며, 저는 난생처음 이 제국의 미래가 걱정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이 나라 중신들은 전부 또라이예요.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