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대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죽기 전에 에게해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복이 있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이 엄청난 행운은 스스로 선물하지 않으면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오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서울의 회색 배경 위로 이리 저리 너무 많이 뿌려진 색깔들을 보느라 지친 나는 스스로에게 푸르름 속에서의 휴식을 선물했다. 완연한 봄의 파릇한 옷자락 끝을 잡고, 여름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불어오는 봄바람을 타고 꿈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리스의 섬들을 여행했다. 그리고 유쾌한 그리스 사람들보다, 담백 깔끔하여 질리지 않던 그릭 샐러드의 맛보다 더 강렬하게 새겨진 그리스 섬 여행의 이미지는 ‘BLUE’였다. --- p.8
삐걱거리는 나무 창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히면 산토리니 칼데라의 절경이 숨을 막히게 하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책은 어느새 덮어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사람 구경하기’ 삼매경이 시작된다. 공기마저 그 푸르름이 스며들어 민트 향이 감돌 것만 같은 이아 마을은 나처럼 신이 나 발에 모터를 단 이들과 그 향에 취해 천천히 미끄러지듯 구경하는 사람들의 빠르고 느린 발걸음들로 울리고 있었다. 문을 반쯤만 열어 놓은 작은 갤러리를 지나치며 그 틈으로 보이는 파스텔로, 물감으로, 색연필로 그린 산토리니의 상징과도 같은 파란 푸딩 같은 돔 그림을 지나쳐 실제 그 파란 푸딩 돔을 쓰고 있는 교회 앞에서 점심 식사를 해결해 줄 곳을 찾았다. --- p.100
얇고 긴 나무 십자가 하나만을 꽂아 둔 소박한 카잔차키스의 묘에는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롭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짤막한 묘비명을 보러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블로그 등에서 많이 보아 익숙한 묘비인데도 막상 이 앞에 서니 훌륭한 사람의 멋진 마지막 말이라고만 생각해 왔던 것과는 다른 기분이다. 나는 여전히 바라는 것도 있고 두려워하는 것도 많아 참 자유롭지 못한데, 마지막 숨을 몰아 쉴 때가 되면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한 발자국 물러나 묘비를 찾은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같은 생각이 많은 사람들을 감싸 안고, 그것이 각기 조금씩 다른 의미로 이들을 흔들고 있음이 보인다. 카잔차키스는 내가 필요했던 만큼의 강도로 나를 꼭 붙잡고 흔들었다. --- p.155
그리스를 떠나는 것은, 아니, 그리스 섬들을 떠나는 것은, 파리나 런던을 떠나는 마음과는 아주 다르다. 금방 또 오면 되지! 하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다시 올 수 있을까, 다듬지 않은 자연의 웅장함과 광활함에 감탄하며 작아지던, 부끄러워하던 마음을 모두 기억할 수 있을까. 창을 활짝 열어 방을 순식간에 채우는 햇빛을 이불 삼아, 다 먹은 짜지키 통은 옆으로 밀어 두고 아침에 요거트에 뿌려 먹던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다 달콤한 짧은 낮잠에 들었다. 온통 푸른 꿈을 꿀 수 있는 그리스 섬에서의 밤들은 이제 다섯 손가락을 접으면 끝이 나니, 낮잠으로라도 그리스 섬 위의 푸른 하늘 꿈을 꾸는 연습을 한다.
그리스의 국기는 파랑과 하양으로 되어 있다. 파랑은 그리스가 가진 아름다운 자연 환경인 바다와 하늘을 상징하며, 하양은 아마도 그리스인들이 품고 있는 이념의 상징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나라의 상징으로서 파랑과 하양의 국기는 그리스인들이 오랜 역사 속에 가꾸어온 그들의 고유한 단순함이며, 이러한 모습들은 그리스 국토에 역사와 문화로 온전히 남아 있다. 맹지나 작가의 [그리스 블루스]는 이 아름다움들을 수천 장의 사진들 가운데 엄선해서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젊은 작가는 오감으로 여행하면서 느낀 파랑과 하양의 아름다운 속살들, 그리고 그 속에서 만난 그리스인들과의 교감 또한 글로 전해준다. 그리스에 다녀왔거나 앞으로 여행할 사람들이 읽어야 할 아름다운 책이다. 론리플래닛코리아매거진 발행인 김옥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