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형에게 음악을 들려줄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일종의 음악 치료 같은 건가. 소영은 살짝 어깨에서 힘을 뺐다. “그런데 왜 하필 저죠?” “물론 다른 연주자도 있었습니다. 계약을 하고 넉넉하게 보수를 지급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다들 기계적인 연주를 하더군요. 그래서 연주를 의뢰할 생각이었습니다만…….” 소영이 호텔에서의 일을 회상하는 동안 건우의 얼굴에 드리운 어둠이 짙어졌다. 형에게 음악 치료를 권하려는 동생의 표정이 왜 이리 비장할까. 건우의 얼굴을 살피던 소영은 긴장을 놓을 수가 없었다. “우연히 박소영 씨의 어려운 상황까지 알아 버렸죠.” 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린 듯 보이는 건 착각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또 하나의 거래를 생각해 냈습니다.” “또다른 거래요?” “그렇습니다.” 확신에 차 있으면서도 냉정한 그의 목소리에 어쩐지 소영은 그 ‘또다른 거래’에 대해 묻기가 두려웠다. 침묵이 흐르고, 그 사이를 클라리넷의 선율이 배회하며 지나갔다. “형을 유혹해 주십시오.” “……네?” 소영은 귀를 의심했다. 진심으로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이것이 과연 평범한 ‘제안’에 해당하는 요구인가. 그와 대화하는 내내 이익을 가늠하던 소영의 계산이 한순간에 어그러졌다. 하지만 당황스러운 심경을 여실히 드러내는 소영을 외면한 채 그는 계속 설명을 이어 갔다. “별장이 하남시의 외진 곳에?있으니 우선 차가 필요할 겁니다. 호텔 주차장에서 남자가 준 명함, 이리 주십시오.” 왜인지 알 수 없었다. 소영은 독선적인 그의 태도보다 자신을 빚쟁이 취급 하는 듯한 뉘앙스가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이 불쾌감이 열등감으로 인한 착각인지, 그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습관인지 소영의 뇌는 판단을 거부하고 있었다. “당장 차를 찾아 주겠습니다.” “이봐요.” “최건우입니다.” “그래요, 최 이사님. 저는……” “단 하루.” 그녀의 말허리를 끊는 건우의 칼날 같은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루만 온전히 버텨 주십시오. 해 보고 정 못하겠다고 해도 환불 요구는 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버티는 기간 동안 매월 천만 원씩을 드리겠습니다.” 예상에 없던 큰 보수에 소영은 거듭 놀라 말을 잃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단호히 말하는 건우와 눈이 마주치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형을 유혹하는 일에 성공하면.” 거침없고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을 듣다 보니 묘한 신뢰감이 생겨났다. 소영의 이마에 땀이 어렸다. 어느덧 그녀는 수상한 거래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5천만 원을 추가로 지급하겠습니다.” “오……” “5천은 최소 금액이고, 결과의 질에 따라 금액은 더 올라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열려던 소영의 입을 그가 단숨에 닫아 버렸다. 소영은 숨을 쉬는 것마저 잊은 상태였다. 5천만 원. 지긋지긋한 닭장 같은 고시원을 당장에라도 탈출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 글쎄요. 음악 치료나 유혹을 떠나서 제가 요즘 상황이 복잡해서요.” 구미가 당기는 순간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생각났다. - 소영아, 특히 달콤한 혀를 경계해야 한다. 언변이 뛰어난 사람을 조심하라는 뜻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처럼. 소영은 그에게 현실을 알릴 필요를 느꼈다. 그 또한 아버지가 재산을 감추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을 시험하는지도 몰랐다. “거래 이야기를 계속 하죠. 별개 조건을 제시하겠습니다. 변호사를 통해 박소영 씨의 주변 정리를 돕겠습니다.” “주변 정리요?” “말 그대로, 박소영 씨와 부친의 주변에 귀찮은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 주겠다는 겁니다.” 이 사람의 진심이 뭘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소영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거래가 진행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제안에, 말도 안 되는 거액의 보수. 뭔가 위험하다며 경계를 부추기던 벨은 망가진 지 오래였다. 몇 분 전부터 소영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동시에 계산하길 포기하고 무조건 그를 신뢰하라고 내부에서 압력을 가해 온다. 소영의 갈등과 상관없이 혀가 아릴 정도로 달콤한 제의는 계속되었다. “2, 3일에 한 번씩 반나절만 시간을 내면 되니 괜찮은 일자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일자리요?” “일자리가 맞습니다. 박소영 씨는 일하고, 나는 돈을 지불하니까요.” 그렇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일이 맞다. 어차피 더 나쁜 인생도 없지 싶다. 차라리 이쪽의 제안을 승낙하고 결정적인 때에 발을 빼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런데도 소영은 선뜻 대답을 하지 않았다. “왜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시죠? 제 역량도 잘 모르시잖아요.” “판단은 내가 합니다.” 짧게 침을 삼킨 소영이 최후의 용기를 쥐어짜 냈다. “그래도……” “왜,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까?” 단단한 그의 물음에 소영은 더 덧붙일 말을 찾지 못했다. 제안을 받은 그녀 스스로 ‘이렇게까지’라고 말할 만큼 후한 조건이었다는 걸 그도, 소영도 이미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