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듯이 또박또박 말하는 남자를 그녀는 잠깐 쳐다본다. 931번 지방도로, 10.4킬로미터, 935번 지방도로, 3.2킬로미터...... 어떻게 숫자들을 저렇게 외우고 있는지.
'부석은 무량수전 뒤에 있다는군요. 정말로 돌이 떠있는지...... 실과 바늘이 드나들 만큼 두 개의 부석 사이가 떠있다는데.'
'가서 확인해 보죠.'
'실하고 바늘 가져왔어요?'
웃지도 않고 남자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사과꽃 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데...... 중얼거리면서.
--- p.33
차 안에 있을 때보다 카페안이 더 썰렁하다. 그녀는 까페 안을 둘러본다. 손님이라곤 그녀와 남자 둘 뿐이다. 그녀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사람 만날 일이 있을 때면 곧잘 약속 장소로 이용하는 까페다. 인사동 입구라서 찾기도 쉽고,혹시 상대방이 늦으면 진열 되어 있는 녹찻잔이나 접시, 화병이나 머그잔 등을 살펴보며 시간을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p.26
제게 소설이란 여태 그런 것입니다. 언제나 저를 여기에 두고 저만치 가 버리는 그런 것. 딴엔 눈을 부릅뜨고 그 뒤를 쫓아가 보지만 가보면 또 저만치 가 버린 뒤입니다. 새 작품을 시작할 때면 흥분과 설렘으로 과연 이번에는 어떤 것이 나오려는가, 스스로 숨 죽이며 긴장하지만, 마쳐 놓고 보면 삶을 뒤쫓아 갈 뿐인 언어의 한 계를 뼈저리게 느낍니다. 그 메워질 수 없는 거리를 감지하면서도 하필 작가로 살아가고 있으니 치유될 수 없는 이괴리가 제운명이라 여깁니다. 이러해서 고독과 죽음 앞에 선 존재 탐구, 살아있는 것들이 지닌 아름다움의 가치, 어긋난 개인과 사회, 등돌린 타자들끼리의 새로운 관계망을 언어로 형성해 보려는 제 여정은 늘 과정에 놓여있을 뿐으로 완성이 될 수 없습니다.
--- p.330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다른 사람이 모두 그래도 나와 너는 그렇지 않아,라고 믿고 싶었던 저변에는 돌연 다른 얼굴이 되는 생의 속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르다고 믿지 않으면 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허영을 벗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살아가는 것이 슬픈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러겠지만 슬퍼도 당신은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으면 한다.
--- p.66,84
운전석에 앉은 그는 조용히 스쳐 가는 차창 밖을 응시하고 있는 여자를 잠시 훔쳐본다. 바람이 얼마나 부는지 텅 빈 벌판에 흩어져 있던 지푸라기나 비닐 같은 것이 허공에서 춤을 추고 있다. 어디에나 새떼들이다. 검은 새떼가 겨울 시린 하늘에 곡선을 그리거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국도에서 만나는 차가운 전신주 위에도 겨울새떼들이 날아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앉아 있다.
바람을 타면 되련마는…… 그는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 이따금 산에서 생활하다 보면 산 속에 살고 있는 짐승들이 얼마나 인간을 싫어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희귀종이고 깊은 산 속에 있는 것들일수록 그랬다. 그들을 제대로 카메라에 담으려면 우선 그들처럼 되어야 했다. 그들이 먹는 것을 먹고 그들이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 자신이 찍으려고 하는 동물이나 새가 풍기는 냄새가 자신에게서도 나기 시작할 때, 그제서야 깊은 바위틈이나 숨겨진 나무에 둥지를 튼 희귀한 새들이 그 주변에서 깃질을 하거나 소리로나마 자태를 드러내곤 한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간혹 메마른 입술을 꼭꼭 깨물기까지한다. 무릎에 얹힌 손에 흔한 반지 하나 끼고 있지 않다. 어제나 오늘 아침에 깎았나 보다. 청결하다기에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손톱이 지나치게 짧다. 차창 쪽에 얹어 놓은 여자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왼손 가까이 오더니 깍지를 낀다. 그것도 잠시, 곧 깍지를 풀어 버리곤 마주대고 싹싹 비벼 댄다. 그것도 잠시, 여자의 두 손은 얼굴로 옮겨져서 눈, 코, 입을 감싼다.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꾹꾹 누르는 것도 같고 뺨을 어루만지는 것도 같으나 무슨 상념엔가 빠져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히 하고 있는 행동이다.
---pp.49~50
여자는 정기구독하는 책이 여러권이었다. <시사저널>, <한겨레21>, <주간동아>같은 시사 잡지가 목요일 쯤이면 한꺼번에 꽂혀있고, 월말이 되면 <스크린>이라는 영화 잡지, <싸이언스>라는 과학지, 한국어판 <내셔널 지오그래픽> 등이 배달되었다.
--- p.57
소설을 생각하면 불끈 자존심이 세워지던 연유는 소설을 통하여 인간의 가치를 성찰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서 작품 쓰기의 내 첫 번째 원칙은 어떤 이유에서든 타자를 상하게 하는 글쓰기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얼굴이 퉁퉁 붓는 것 같이 막막한 일들이 많이 있겠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문학을 생의 불빛으로 여기며 더듬더듬 길을 찾을 때와 같은 마음을 잃지 않으려고 한다.
--- p.340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입구가 좁은 동굴을 발견했을 때 잠시 멈춰 섰다가 가쁜 숨을 가다듬고 이마의 땀을 닦을 다음 별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간 것도, 그러니까 세상의 바같에 대한 그 치명적인 숨은 꿈이 등을 떠밀었기 때문이었을까. 마치 그 동굴을 찾아 거기까지 오기라도 한 것처럼 발걸음이 자연스러웠다. 그야 물론 그 감정, 이를테면 마음속의 숨은 꿈이 이입된 것이었겠지만, 안에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 p.168
'부석은 무량수전 뒤에 있다는군요. 정말로 돌이 떠있는지... 실과 바늘이 드나들 만큼 두 개의 부석 사이가 떠있다는데.'
'가서 확인해 보죠.'
'실하고 바늘 가져왔어요?'
웃지도 않고 남자는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른다. 사과꽃 필 때가 가장 아름답다는데... 중얼거리면서.
--- p.33
무슨 생각을 하는지 여자는 간혹 메마른 입술을 꼭꼭 깨물기까지한다. 무릎에 얹힌 손에 흔한 반지 하나 끼고 있지 않다. 어제나 오늘 아침에 깎았나 보다. 청결하다기에는 아픔이 느껴질 정도로 손톱이 지나치게 짧다. 차창 쪽에 얹어 놓은 여자의 오른손이 무릎 위에 놓여 있는 왼손 가까이 오더니 깍지를 낀다. 그것도 잠시, 곧 깍지를 풀어 버리곤 마주대고 싹싹 비벼 댄다. 그것도 잠시, 여자의 두 손은 얼굴로 옮겨져서 눈, 코, 입을 감싼다. 손가락으로 눈자위를 꾹꾹 누르는 것도 같고 뺨을 어루만지는 것도 같으나 무슨 상념엔가 빠져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 무심히 하고 있는 행동이다.
--- p.
너 같은 사람들은 뭔가 착각하고 있는게 분명해. 아무것도 없으면서 뭔가를 가졌다고. 지켜야 하는 뭔가가 자기네들에게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아니면 자기네들이 이 체제의 상층부에 있다고 착각하거나, 혹은 상층부로 진입할 수 있는 후보자들이라고 착각하거나. 하지만 천만에. 지금 우리들이 노동자들을 배신했듯이 우리들 역시 머지 않아 배신당하고 말 거야.(모든 나무는 얘기를 한다 중에서..)
--- p.254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하기야 6개월밖에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은 사람이 5년 넘게 살아있기도 하고, 오장육부가 모두 멀쩡하다는 진단을 받은 사람이 병원 문을 나서다가 자동차에 치여 목숨을 잃기도 한다(그런 사람들이 내 주변에 있다. 5년 넘게 살고 있는 사람은 아내의 첫째 언니이고, 자동차에 치여 죽은 사람은 대학 동창의 아버지이다).
--- p.189
그전까지 그녀는 P생각을 하면 분간이 서질 않았다. 그녀는 P의 약혼기간 동안조차도 P의 변심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P에게 연락을 하지 못했던 건 P의 변심을 기정사실화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의 변심을 확인한 뒤 자신이 받을 상처에 대해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였다.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심리 상태로 그녀는 그 시간들을 견디고 있었던 것이다.
--- p.65
그래 오늘 '하나만'이라도 찾으면 되는 거야. 둘도 바라지 않아. '하나만' 있으면 돼. 그러나 무인도 씨 옆을 스쳐 지나가는 남자는 얼굴 전체에 윤기가 흐르는 30대 장년이었다. 여자는 손 대면 톡 터질 것 같은 20대의 싱싱한 몸매를 하고 있었다.
'여기 나보다 늙은 사람은 없나요?'
결국 무인도 씨는 바보스런 질문을 하고 말았다.
'글쎄, 겁도 나지 않느냐구요?'
접객실 여자는 창구 쪽에 놓인 전화기를 매만졌다.
'없다는 말이군요. 알았어요'
--- p.320
그들은 그후로 가끔 그 산길에서 만나 단층짜리 붉은 벽돌집 앞의 밭에 자라는 채소들을 서리하곤 했다. 상추철이 지난 후론 아욱을 뜯어 올 때도 있었고, 막 속이 차 오른 배추를 한 포기 뽑아 온 적도 있었다. 애호박을 한개 따 온 적도 있었으나 그들이 주로 탐낸 것은 상추였다. 혼자일 때는 그럴 염이 나지 않다가도 그녀는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남자를 만나면 채소서리에 발동이 걸리곤 했다. 혼자일 때는 마음이 고요했다가도 남자를 만나게 되면 벌써 그 연한 것들을 씹었을 때의 신선한 맛이 혀끝에 감도는 것이었다.
--- p.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