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동래부사와 주영공사를 지낸 민영돈의 장녀로 189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부터 활달하고 총명해 열한 살 때 영친왕 이은의 비로 ‘간택’되었다. 1907년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끌려간 후 10년간 귀국을 기다렸으나, 영친왕은 결국 일본의 마사코(이방자) 공주와 정략결혼을 하게 되고 그녀는 강제 파혼당한다. 일제에 의한 강제 파혼의 충격으로 할머니에 이어 아버지가 급사하고 온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한번 간택되면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 없다는 왕실의 법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해서든 결혼을 시켜 영친왕과의 연을 끊으려는 일제의 집요한 공작을 견디다 못해 상하이로 망명, 고독과 고통의 세월을 보냈다. 상하이 시절 임시정부의 김규식 박사가 독립운동을 권유했지만 “나 하나의 희생으로 만사가 평온하기를 바랄 뿐”이라며 거절했다.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는 것을 일종의 독립운동이요, 자신을 지키는 일로 여기며 평생 절개를 지켰다. 1945년 해방 후 귀국, 사업에 손을 댔으나 실패하고 빈곤한 삶을 살다가 1968년 3월 후두암으로 71세의 생을 마감했다.
양전마마께서 물으시는 대로 거침없이 대답을 하자 기특한지 무릎을 치며 기꺼워하셨다. 그로 말미암아 내정적으로는 거의 나로 확정이 된 셈이다. 그러나 나랏법은 그렇지가 않아서 형식적으로라도 세 명을 뽑아야 되므로 나 외에 의정대신을 지낸 민영규 씨의 따님과 심씨댁 따님, 이렇게 셋이 첫 간택에 뽑혔다. -본문 47쪽
망망대해 위에 의지할 곳 없는 두 남매가 서 있자니, 나느니 눈물이요 쉬느니 한숨뿐이었다. 어린 날의 화려했던 그 꿈은 어디로 사라지고 이젠 인생의 절경인 청춘을 눈물로 보내야만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 치가 떨렸다. 왜적의 침입만 안 받았더라도 오늘날 이 나라가 이렇게 망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이 민족도 압박 속에서 살진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나도 부모 밑에서 효도하며 나라에 충성하고 이웃과 의좋게 복되게 살 것이 아닌가.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역적배와 나라 를 집어먹으려던 도적배들로 이 나라 이 민족이 이토록 고생을 당하는 생각을 하면 이가 갈렸다. -본문 117쪽
“미스 민, 암만 해도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좋겠어. 어제 일본영사관에서 나와 당신의 신원을 조사해 갔어. 교감하구 같이 밤새도록 생각한 결과 미스 민을 휴학시키기로 했어. 그리고 지금 곧 그 집에서 이사를 가도록 하시오. 내가 외숙께 편지는 써놓았으니 가지고 가시오. 우리로서도 어떻게든지 미스 민을 도우려는 뜻으로 하는 일이니 조금도 섭섭히 생각지 말고 내일부터는 학교를 나오지 마시오.” 교장선생님의 이 말씀을 듣자 나는 온 몸에서 맥이 풀려나는 듯 꼼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금시로 사형선고라도 받는 것과 같이 눈앞이 캄캄해졌다. -본문 156쪽
나는 무슨 운명이기에 홀로 일생을 보내려는 데도 이렇게 애로가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만 해도 아저씨 회사의 부사장인 프랑스 청년이 “당신의 따님과 꼭 결혼을 시켜주십시오”하고 매일같이 졸라댔던 것이다. 아저씨와 나와 아주머니가 같이 나가곤 했기 때문에 꼭 나를 아저씨의 딸인 줄로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저씨를 졸라 딸을 달라고들 했으나 이미 모든 것을 단념한 나에게는 관련될 수 없는 일인 것을 아신 아저씨께서는 언제나 즉석에서 “무슨 당치 않은 소리”하고 거절하셨으나 그는 우리 사정을 납득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본문 188쪽
그러나 본국에만은 돌아가고 싶지가 않았다. 꿈마다 찾아가고 오매로 잊지 못하며 그리워하던 내 나라 내 조국이건만 이제 그 땅을 다시 디딘다면 슬프고 가슴 아팠던 과거가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서 갈기갈기 찢기다 남은 인생을 더욱 괴롭힐 것만 같았다. 인간의 기능은 기묘해서 슬픈 추억보다는 기쁜 추억들이 더 오래 뇌리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삶의 의욕을 느낀다는 말도 들었으나 내 인생은 온통 슬프기만 했던 과거라 기쁨의 기억은 손톱만치도 없으니 길고 짧음이 어디 있으며, 오래고 더딤이 슬픔밖에 또 있으랴? -본문 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