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과 손이 스치고 빙그르르 치맛자락이 돌았다. 어깨와 어깨가 조금씩 부딪히고 샤미르의 손이 어깨를 둘렀다가 놓여졌다.
“아까까지만 해도 너랑 이렇게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어. 그냥 머릿속이 복잡했는데.”
“상황이란 늘 변하는 거니까, 헤샤미온.”
“양지가 음지 되고, 음지가 양지 되듯 말이야?”
“그렇지.”
뭐가 즐거운지 샤미르가 연신 웃었다. 샤미르가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졌다. 숨소리가 들릴 만큼 지척에 있다가 어느 순간 아주 정중하게 멀어진다. 닿을 듯 닿을 듯 아스라한 별빛처럼 그가 닿을 듯 말 듯 그렇게 존재했다.
두근. 두근. 두근.
기분이 아주 이상했다. 옷차림이 사람을 규정한다면, 나는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여자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조심스럽게 허리를 휘어 감기는 손과 다정한 눈빛. 바깥에서 흐르는 음악은 눈물이 흐를 듯 아름다웠고 샤미르의 뒤로 보이는 초승달은 아릿아릿하였다. 그가 나를 잠시 눕혔다 등 뒤에서 나를 감싸고 다시 방을 원형으로 돌았다.
빙그르르.
치마가 부드럽게 두어 바퀴를 돈 후, 샤미르가 그대로 돈 나를 자기에게 바짝 끌어당겼다. 나도 그리 작은 키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샤미르는 나보다 더 커서, 나는 그 안에 오롯이 안긴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 좋아해?”
“으응? 아, 어. 좋아하지.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말해도 넌 좋은 친구고, 좋은 사람이야.”
“그렇구나. 나도 널 좋아해. 넌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날 가장 좋은 나로 만드는 사람이니까.”
표정이 뭐라 말할 수 없이 애틋하고 아릿해서 마음 한켠이 찡했다. 초승달 빛 아래 샤미르가 해맑게 웃더니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예쁘다.”
샤미르는 언제나 나에게 솔직하다. 화를 내는 모습도, 감성적이고 여린 속내도, 그러면서도 일에 있어서 냉정한 면도 모두 다 나에게 비춰준다. 나는 이 순간만은 여자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예쁘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 아님에도 샤미르가 말한 순간 그 말은 매우 특별하게 들렸다. 그가 손을 들더니 내 입술에 손을 대었다.
“입술에 바른 색은 빼고.”
손가락이 입술에 닿아 색을 지웠다. 손끝에 말랑한 입술이 천천히 밀리고, 샤미르의 얼굴도 천천히 내려왔다.
쾅!
문이 열리며 푸른색 정장을 입은 카세리온이 들어왔다. 그 옆에는 레이라가 있었다. 카세리온이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나를 획 낚아챘다. 그러고는 갑자기 내 옷 윗부분에 손을 집어넣어 가슴 보형물을 마구잡이로 끄집어내더니 바닥으로 던지며 외쳤다.
“야! 여자 옷 하나 입었다고 여자처럼 생각하는 거야?”
“카세리온.”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카세리온을 바라봤다. 그러나 가슴 보형물이 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나도 제정신이 들었다. 맙소사. 내가 친구인 샤미르와 무슨 닭살스러운 짓이었담. 아무래도 분위기에 취했던 모양이었다. 샤미르는 그냥 빙글빙글 웃으면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레이라가 가슴 보형물을 집어 들더니 먼지를 탈탈 털며 말을 걸었다.
“그런데 카세리온. 그렇게 따지면 너도 남자 옷을 입고 있을 뿐이잖아. 아직 완전한 남자는 아니니까.”
“헤샤미온하고 나는 남자 지향이니까, 헤샤미온의 저런 분위기는 안 어울린다는 말을 하고 있었던 거야.”
카세리온이 한풀 누그러진 말투로 덧붙였다. 붉은 옷에 화려한 화장을 한 레이라는 내가 봐도 매우 아름다웠다. 미인에게 껌뻑 죽는 카세리온이 절대 레이라를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레이라가 빙긋 웃었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축제라고. 그리고 가슴을 보완해주는 도구를 이렇게 함부로 던지다니. 숙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러니까 헤샤미온은 숙녀가 아니라고…….”
“오늘만이잖아, 오늘만. 그럼 너도 신사가 아니니까 내 파트너 아니네?”
카세리온은 침묵했다. 어떻게 레이라가 파트너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카세리온의 입장에서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터였다.
“카세리온, 너 퍼레이드 참여는 어떻게 하고 여기 왔어?”
“너랑 샤미르가 깽판 치고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거기 가만히 있냐? 그래도 저 녀석 성격에 많이 참았더라.”
“칭찬이지, 그거?”
샤미르가 여유 있게 되묻자, 카세리온은 획 고개를 돌렸다. 레이라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가슴 보형물, 다시 줘? 넣을래?”
나는 가슴을 바라보았다. 판판한 가슴. 그렇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여자도 아니고 그런 건 필요 없다.
“아니야. 괜찮아. 그런데 어떻게 네가 카세리온의 파트너가 되었어?”
“그게, 남자애들이 내가 어떤 남자든 같이 있는 건 못 보겠다나? 카세리온은 아직 남자도 여자도 아니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하면서 짝지어주던데. 단장한 내 모습은 보고 싶다나 뭐라나. 하지만 카세리온이 같이 도망 나오자고 해서 다행이었지.”
레이라가 즐거운 듯 웃었다. 그러더니 너른 하늘이 펼쳐져 있는 창밖을 바라보며 덧붙였다.
“여기, 비행 시도해보기 좋겠다.”
역시, 레이라다웠다. 레이라가 아름다운 이유는 자신의 삶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긍정했다.
“그러게.”
그 순간, 창밖으로 화려하게 폭죽이 터졌다. 나는 바로 샤미르를 불렀다.
“샤미르, 불꽃놀이다!”
나는 예전부터 불꽃놀이를 아주 좋아했다. 밤하늘에 펼쳐지는 수많은 아름다운 영상들은 갖가지 모양과 색을 입고 늘 새롭게 태어나곤 했다.
“자, 다 같이 보자.”
레이라가 붉은 옷을 입은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옆자리를 탁탁 치며 카세리온을 불렀다. 카세리온이 그 옆에 앉았다. 샤미르도 내 옆으로 왔다. 펑, 하고 노란 불꽃이 동그랗게 터지며 붉은빛으로 바뀌는 순간, 나는 알베르토가 준 화장도구를 찾아볼까 하다가 그냥 두기로 결심했다.
나에게는 이 순간이 소중했고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소중했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