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북한산에 단풍이 짙게 물든 가을이었다. 이웃집에 사는 한 소년이 병든 기러기 한 마리를 데리고 와 내게 돌보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기러기는 날개가 부러진 탓으로 제대로 날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곧 죽을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 하든 기러기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으로 목기러기를 만드는 일보다 더 정성을 기울였다. 통풍이 잘 되는 방안에 두고 맑은 물과 모이를 주면서 잠시도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자 기러기는 곧 원기를 회복했다. 날개도 다 나아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지 계속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나는 얼른 창문을 열어주었다. 기러기는 몇 번 방안을 맴돌더니 푸른 가을 하늘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기러기가 날아간 가을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일행들과 뒤떨어져 혼자 외롭게 날아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마침 기러기떼 한 무리가 하늘을 날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중략)
그런데 문을 열고 목공소 안으로 들어가자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목공소 안에는 그동안 내가 만든 목기러기들이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중략)
'네가 병든 기러기 한 마리를 살려 하늘로 날려보냈다지?'
'네. 이웃집 소년이 불쌍하다고 가져온 것입니다.'
'그래, 수고했다. 이제 그만하면 됐구나. 내 너를 사위로 삼으마.'
스승께서 무슨 말씀을 했는지 한동안 나는 알지 못했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떼의 울음소리만 내 귀에 가득했다.
--- p.136-137
어느 날 어둠이 내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울고 있을 게 아니라, 넌 이제부터 기다릴 줄을 알아야 해.'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다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둠아, 도대체 기다림이란 게 뭔데 그런 말을 하니?'
'그건 네가 소망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시간이며 의지야.'
...
어둠은 '이 세상에 누구든 기다림을 지니지 않고 사는 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 p.74
사실 나는 처음부터 오만한 나무는 아니었습니다. 다른 나무들 처럼 겸손할 줄 도 알고 부끄러움도 아는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 인가 다른 자작나무들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데 나만 자꾸 키가 자라 다른 자작나무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 내가 오만한 나무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을 것입니다. 다른 자작나무들이 다들 눈 아래로 내려다 보이자 나도 모르게 그들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키가 크기 때문에 구름속을 뚫고 나온 햇볕도 가장 먼저 쬐었으며, 천지의 겨울 바람 사이로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도 가장 먼저 쐬었으며, 한 겨울에 펑펑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도 가장 먼저 맞이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나는 피부또한 희고 깨끗해서 눈이 부셨습니다. 다른 자작나무들은 마른버짐이 핀 것처럼 그저 희끗희끗 하기만 해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 p.110
나는 어린아이인 양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내가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버려져 있다가 종메가 된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루속히 종을 한번 쳐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드디어 12월 31일 제야의 밤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신각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는 0시가 되지 흰 장갑을 낀 서울시장이 처음으로 힘껏 종을 쳤습니다.
아, 새해의 밤하늘에 아름다운 종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러나 종소리는 아름다웠지만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웠습니다. 온몸이 으깨지는 것 같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미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연이어 종신에 내 몸을 힘껏 부딪쳐야만 했습니다. 서른세 번 종을 칠 때마다 나는 거의 까무라칠 뻔했으나 아무도 내 아픔을 아는 이는 없었습니다.
--- p.42
그러자 기러기는 곧 원기를 회복했다. 날개도 다 나아 어디로 날아가고 싶은지 계속 날개를 푸드덕거렸다. 나는 얼른 창문을 열어주었다. 기러기는 몇 번 방안을 맴돌더니 푸른 가을 하늘 속으로 재빨리 사라져 버렸다. 나는 기러기가 날아간 가을하늘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일행들과 뒤떨어져 혼자 외롭게 날아가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는데 마침 기러기떼 한 무리가 하늘을 날고 있어 참으로 다행이었다
--- p.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