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비는 한나라 왕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권력을 장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 어진 인재를 등용하는 데 힘쓰기는커녕, 도리어 실속 없는 소인배들을 등용하여 그들을 실질적인 공로자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히는 것을 매우 가슴아파했다. 또 유학을 내세우는 자들은 경전을 들먹이며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협객은 무력으로 나라의 법령을 어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게다가 군주가 나라가 태평할 때는 이름을 날리는 유세가들만 총애하다가 나라가 위급해지면 허겁지겁 갑옷 입은 무사를 등용하는 점 또한 못마땅하게 여겼다. 한비는 앞선 법가들이 직접 체험한 역사적 교훈을 살려 한나라 왕에게 법가가 표방하는 정치노선을 채택하도록 요구한 바 있었다.--- pp.28-29
한비나 기타 법가들은 이처럼 현실적인 인간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파악했다. 현실적 인간은 도덕적으로 교화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성품은 악하다는 전제 아래 법가의 통치방법을 구상했기 때문에 법가의 통치방법은 실용적이다. 한비는 유가 비판을 통해 법치의 필연성을 논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본성이 악함을 논증함으로써 법치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결국 한비에게 성악설은 법치의 기본 전제조건이자 필요조건이었다.--- p.46
한비에 의하면, 법치의 완성은 곧 도의 실현이다. 여기에서 노자적 도의 이상과 한비의 법치사상은 일치한다. 추상적인 도는 현실에서 덕으로 드러난다. 노자나 한비는 덕의 실현이 현명한 군주를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여기에서 군주의 역할이 강조된다. 군주는 도를 파악하고 법을 제정하는 자다. 한비가 군주의 권한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p.95
‘한비의 법사상이 실정법이냐 자연법이냐’의 문제는 보다 상세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비자』의 여러 편에 나타나는 법치의 중점이 노자적 도에 근거한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한 한비의 법사상이 자연법적 요소를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자연의 질서인 도에서 법의 근거를 구하는 한비의 태도는 객관정신의 발현이다. 법은 공평무사한 것이어야 한다. 법의 공평무사성은 군주의 사적 판단을 배제하는 무위, 곧 도의 정신과 뗄 수 없는 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