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서점 안은 교복을 입은 학생들로 붐볐다. 토요일이니까. 일요일 하루는 만화를 보고 그래도 되는 거니까. 다들 그러는 거니까. 교복을 입고 벗은 앳된 얼굴 사이로, 대학생으로 보이는 얼굴들도 보였다. 하긴, 대학에 갔다고 해서 만화를 끊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한 번 만화에 미치면, 죽을 때까지 만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다. --- p.43
“평생 만화만 보고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보노보노가 말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방 하나 가득 만화책이었으면. 바다 서점의 만화책이 다 내 것이라면. 밤이고 낮이고 잉크로 그림을 그렸으면. 갖고 싶은 마커랑 톤도 마음껏 사들였으면. 대여점 말고 도서관에도 만화책이 가득했으면. 라이트 박스도 하나 있다면. 아무도 만화를 본다고, 또 그린다고 뭐라고 하지 않았으면. 빨리 스무 살이 되었으면.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야자나 보충수업하고 안녕했으면. --- p.77
“이제 뭘 하지?” 해교가 묻자 보노보노가 어깨를 으쓱 들어올렸다. “네 맘이지. 너 하고 싶은 걸 해.” 진짜? 해교는 네 마음대로라는 말이 당황스러웠다. 막상 학교를 나오고 보니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을 해라, 저것은 하지 마라, 이것만은 절대 안 된다, 그것은 꼭 해야 한다, 이런 말들만 들어오며 열일곱이 되지 않았던가. 해교는 다시 한 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진짜 뭐 하지?” --- p.161
김연분 여사는 차마 아파트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동시에 떠날 수도 없었다. 여사의 짧은 행복과 긴 불행(=전 인생)은 다 저 자리에서 시작한 것이니까. 어떻게 사람들은 저기가 어떤 자리였는지 까맣게 잊었을까. 어떻게 저리 (낡고) 평온할 수 있을까. 왜 누군가는 다치고 부서지는데, 왜 누군가는 다치고 부서진 사람들을 까맣게 잊고 즐겁고 행복한가. 이건 다 누구 때문인가. 적어도 김연분 여사 자신의 탓은 아니었다. 열심히 살았지 않은가. 안 해본 일 없이 고생하며 늙지 않았나. 억울하지 않은가. --- p.168
해인의 독특한 지론 하나는 ‘헤어진 남자친구의 행복을 빌라’였다. 막 끝낸 연애가 짧든 길든, 진지했든 가벼웠든 간에 해인은 전 남자친구의행복과 행운을 진심으로 기원했다. “나는 걔가 (나를 만날 때보다) 훨씬 잘되었으면 좋겠어. 로또에 당첨된다든가, 고속 승진을 한다든가, 진짜 예쁘고 마음씨 착한 여자를 만나 팔자가 핀다든가 해서 말이야.” 그런 말을 하는 해인의 눈동자는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어서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왜요? 이정이 물었다. 정말 언니는 원망스러운 마음이 조금도 안 들어요? 원래는 다 그렇지 않은가. 아무리 뒤끝 없는척을 해도 다들 서운한 마음이 들기 마련이잖아. “남자들은 이상해. 헤어지고 잘 안 되면 여자 탓으로 돌린다구. 그러다 수가 확 틀리면 해코지도 하잖아. 잊을 수 없었다는 둥, 아직 헤어진 게 아니라는 둥, 복수라는 둥. 일이 잘 안 되면 안 될수록, 상황이 나빠지면 나빠질수록, 자꾸 헤어진 여자친구를 떠올리는 남자들이 태반이라고. 그러니까 헤어진 다음에 남자는 날 만날 때보다 무조건 더 잘되고, 더 행복해져야 해. 그래야 나를 까맣게 잊지.”